제3화 : 시반(時盤)의 집행 : 예정된 부친상(父親喪)
“말도 안 돼……!”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장의 종이, 누군가의 일과표!
다시 꺼내어 본 봉첩 속 빼곡한 글씨들은 이 책들의 주인과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은 필체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있을 수 없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글자의 머리를 45도 각도로 깊게 눌러 꺾는 나만의 고집스러운 기필(起筆),
갈고리 획 끝을 미세하게 안쪽으로 말아 올리는 고질적인 버릇,
문장의 끝마다 붓을 꾹 눌러 떼며 남기는 묵직한 돈 점(頓點). 붓을 쥐는 법, 종이를 누르는 압력,
심지어 글자를 쓸 때 내쉬는 호흡의 길이까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으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근육의 기억.
내 것이다. 분명히 내 것이다!
200년 전의 낡은 먹색 위에도, 오늘 내가 연습장에 휘갈긴 낙서 위에도
똑같은 궤적의 영혼이 지문처럼 박혀 있었다. 거울 속의 내가 나를 보고 있듯,
종이 너머의 누군가가 200년의 시간을 건너와 나의 손을 빌려 쓴 것만 같았다.
‘잠시만, 이 독특한 격자무늬... 그래, 어제도 봤어!’
기억의 파편이 맞춰지는 순간,
나는 어제 전 팀장의 전화를 받다 무릎 아래로 떨어뜨렸던 봉투를 미친 듯이 찾았다.
연서인지 유서인지 모를 그 기이한 동계 선생의 친전 봉투를.
‘있다! 함께 동봉된 일과표와 똑같아. 칸 은 비어 있지만... 틀림없어.’
형광등 불빛 아래 두 장의 종이를 포개어 올렸다.
'인쇄되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정교하게 똑같지... 않다.'!
한 장은 세로의 물결, 한 장은 가로의 물결.
양방향에서 밀려온 묵직한 먹줄들이 불빛 아래서 하나로 겹치는 순간,
그것은 영락없는 쇠사슬의 형상이 되었다. 하루하루를 나누던 칸들은 이제 촘촘한 창살이 되어,
그 안에 적힌 인간의 일과를 비웃듯 가두고 있었다.
'이건 줄이 아니야. 사슬이야!'
종이 위에 평면으로 존재하던 검은 격자들이 철컹철컹, 소름 끼치는 금속음을 내며
서로의 고리를 걸어 잠그더니, 이내 눈이 시릴 정도의 금빛 섬광을 뿜어내며 튀어 올랐다.
“악!”
너무 놀라 종이를 내던지려 했지만, 내 팔은 속절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지옥의 아귀가 밑바닥에서 잡아당기는 듯한 가공할 무게감.
포개진 종이의 격자 틈새에서 흘러나온 금빛 액체가 이내 가느다란 쇠사슬이 되어
내 손목을 칭칭 감아 올랐다.
얼음장 같은 금속의 냉기가 피부를 뚫고 뼈마디까지 시리게 파고들며 손목을 타고 팔꿈치,
어깨, 그리고 가슴으로. 금빛 사슬은 내 몸을 격자표의 칸처럼 촘촘하게 옥죄어왔다.
사슬이 지나간 자리에선 살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뒤따랐다.
냉기와 열기가 교차하는 기괴한 고통 속에 갈비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감이 몰려왔다.
이어 심장을 움켜쥔 쇠사슬은 쿵, 쿵, 묵직한 금속음으로 내 전신을 울렸다.
‘정말 이러다 죽을 거 같아. 숨을...’
목을 조르는 차가운 감각에 빨려 들어가듯 헙, 하고 마지막 숨이 멎었다.
그렇게 나는 죽었다.
거대한 먹물 속에 풍덩 던져진 기분이었다.
온몸을 감싸는 묵향이 요동치던 심장을 재웠고,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던 그때, 아주 낯익고도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천라지망(天羅地網)은 산 자의 것이 아니요, 유(酉)의 시간은 아직 다하지 않았으니. 시반을 거꾸로 돌려 생(生)의 칸으로 돌아가라. 파묵(破墨)!”
-쿵!-
심장을 찍어내리는 통증과 함께 눈이 떠졌다.
온몸을 둘러봐도 작은 먹물 한 방울 튀지 않은 출근 복장 그대로였다.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그 망할 종이부터 찾았다.
책상 위에는 다시 평범한 먹색 선이 그어진 두 장의 종이만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분명 아무것도 없던 빈칸 속에 익숙한 필체가 박혀 있었다.
[부친상(父親喪) - 김서희]
'망할, 또 내 글씨였다. 게다가 옆에 선명히 새겨진 날짜. 2026년 8월 1일.'
“뭐야? 오늘이야, 내일이야? 오늘 며칠이지?”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부친상이라니. 게다가 내 이름이 적혀 있다면 우리 아빠를 말하는 건가?.'
이 재수 없는 종이를 찢어버리려 손을 뻗는 순간, 다시 숨이 턱 막혔다.
왼손 손가락 끝에서부터 금빛 사슬이 혈관처럼 살아 움직이며 손목을 타고 뛰고 있었다.
미친 듯이 문질러봐도 소용없었다. 피부 아래 박힌 낙인은 내 맥박을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아빠의 장례가 새겨진 이 불길한 종이를 그저 찢어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강 교수님의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교수님! 저 서희예요. 제발, 제발 지금 톡으로 보낸 사진 좀 봐주세요. 빨리요!”
잠시 후, 사진을 확인한 듯 수화기 너머에서 교수님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낮고 신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희야, 너 지금 어디냐? 일단 진정하고, 그 두 장의 종이 당장 떼어 놔라.-
평소의 인자함 대신, 학자 특유의 예리하고도 서늘한 긴장감이 서린 목소리였다.
“교수님, 그게 뭔지 아시겠어요?”
-이건... 아무리 봐도 고대 주술사들이 써오던 금기의 술법 도구 중 하나인 ‘시반(時盤)’ 같구나. 학계에 정식으로 보고된 적은 없지만, 그 특유의 격자 문양은 고문헌 곳곳에 불길한 기록으로 남아있지.-
“시반(時盤)이요? 그게 정확히 뭔가요?”
-한자 그대로 ‘시간의 소반’이다. 시간을 속박하는 도구라고 알려져 있지만,
철저히 금기시되었던 걸 보면 분명 좋은 물건은 아닐 게다.그런데 서희야...
설마 그 귀한 종이에 네가 지금 낙서를 한 거니? 부친상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고약한 장난이야?
‘저도 장난이었으면 좋겠어요, 교수님.’
대답 대신 멍하니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금빛 사슬과 종이 쪼가리들을 번갈아 보았다.
터져 나오려는 오열을 억누르는 나의 위태로운 침묵을 견디지 못한 듯,
교수님이 다급하게 말을 이으셨다.
-뭐가 됐든 불길하다. 도상학적으로 사슬은 결박과 집행을 뜻해. 게다가 맨 위의 유(酉) 자와 아래의 한자들도 예사롭지 않구나. 귀신이 드나드는 시간을 가리키고 있어. 이건 결코 단순한 일과표일 리가 없다. 이미 확정된 과거를 현재로 끌어와 강제로 실행하려는 주술적 장치일 가능성이 커. 정해진 운명을 고착시키기 위한 일종의 [집행장(執行狀)]인 게야. 두 장을 겹치는 행위 자체가 어쩌면 집행장을 완성하는 주술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서희야, 혹시 모르니 절대 겹쳐두지 마라. 웬만하면 건드리지도 말고. 알겠니?-
교수님의 충고는 지극히 이성적이었으나, 내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핸드폰을 쥔 내 왼손, 손가락 끝에서부터 맥박을 타고 올라온 금빛 사슬이 혈관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피부를 뚫고 뼈마디를 파고드는 이 끔찍한 결박감.
“이미 늦었어요, 교수님……”
입술 사이로 서글픈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미 사슬은 내 손목을 단단히 휘감았고, 멈춰있던 시반의 톱니바퀴는 돌기 시작했다.
“이미 겹쳐졌고…… 집행장은 발행됐어요. 제게.”
내일, 아빠가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