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
뭐 하려고 했더라? 이런, 또 시작이군. 무언가를 하려고 일어섰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찜찜한 순간들이 날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다. 일단 일정이 있으니 나서고 본다. 버스 검색을 했더니 다행히, 모임 장소에 약속 시간 30분 전에 도착할 수 있겠다. 여유 있게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한참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자를 받았다. ‘9시 시작 맞죠?’ 엥? 휴대전화 화면은 8시 59분을 보여주고 있고 나는 아직 반도 못 갔다. 잠시 정신이 멍해지는가 싶어 고개를 흔들고 눈을 이리저리 굴려봤더니 정신이 조금 든다. 밖으로 내뱉는 말, 9시 모임, 여유 있게 검색한답시고 기준으로 정한 시간은, 10시였다. 이 무슨,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나갈 채비를 하고 나서 한참을, 버스 시간에 맞추려 빈둥거린 내 시간은 그렇다 치고, 타인의 시간을 30분이나 잡아먹다니, 몹쓸 노릇이다. 아직 한참은 더 사용해야 할 나의 몸아, 좀 더 애써야 할 것 같아. 계절이 어느새 슬쩍 넘어가듯 그렇게 마냥 어물쩍 흘러가서는 안 될 것 같아.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 약을 먹고 있다. 내 몸에 깊이 새겨진 집안 내력, 무엇이든 타고난 걸 이겨내긴 쉽지 않지. 걷는 걸 즐겨하고 육식을 즐기지 않지만, 물려받은 피로 약을 먹은 지 10년 가까이 되어 간다. 육지에서 떼온 그동안의 기록으로 약을 처방받으려 (피검사 없기를 바라며) 병원을 찾았다. 눈뜨자마자 해장국이 시급한 동행인을 따라 막 밥을 먹은 후였다. 역시나, 느릿한 말투를 지닌 의사 선생님은 피검사를 권했다.
- 밥을 금방 먹고 왔어요.
- 아 식후가 더 정확하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 아…
- AI에 물어볼까요?
안으로 감기는, 느린 말투를 지닌 의사 선생님은 챗GPT를 모니터로 불러낸다. 조르륵 아래로 흘러내리는 챗GPT의 답변. 옆으로 힐끗 들여다본 결론은 그래서, ‘식전 피검사를 추천합니다.’였다.
- 아, 질문을 다시 해봐야겠군요.
- 아, 선생님이 괜찮으시다면 피검사하고 갈게요
병원 드나들기를 귀찮아하는 나는 나선 김에 (식후) 피검사를 진행했다. 결과야 뭐 의사 선생님이 알아서 잘 판단하시려니. 병원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내려갔다. 약 나오길 기다리며 두리번거리다 기미 크림을 발견, 약사님의 친절한 설명을 들었다. 상비약이며 이것저것 계산하고 보드라운 하얀 봉지에 챙겨진 약들을 넘겨받았다. 집에 와서 정리하려고 보니 어라, 기미 크림이 없다. 약국에 전화했다.
- 약사님, 좀 전에 기미 크림을 샀는데 집에 오니 없어요.
- 그건 보여드리기만 한 거예요, 계산에 안 넣었는데.
이런, 나는 산 거였는데. 소통의 오류가 있었다. 나중에 사러 갈게요, 하고 끊었다. 전화를.
아침에 칫솔을 입에 넣으려다 멈칫, 했다. 다행히 입에 넣진 않았다. 초록색 반투명한 치약이 올라가 있어야 할 자리에 희끄무레한 크림 같은 것이 얹어져 있었다. 세수할 때나 쓰는 폼이 치약 위에 얌전히 올라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내 손이 한 짓이다. 뜨거운 물에 칫솔을 연거푸 소독하며 ‘이제 그만’을 중얼거렸다.
오후 회사 로비, 고용센터에서 ‘일자리 상담’ 자리를 마련했다. 계약기간이 얼마 안 남은 터라 상담하려고 앉았다. 인적 사항을 적으라고 종이를 내밀기에 빈칸을 메워갔다. 주소를 적으려 제주시 애월읍까지 적었는데 그다음 주소가 먹먹하다. ‘아 주소가 기억이 안 나요.’ 했더니 작은 눈의 얼굴이 웃는지 아닌지 모르게 ‘건물 이름 아세요?’ 한다. 다행히 빌라 이름은 생각이 났다. 작은 눈의 직원분이 검색해서 알려준다. 우리 집 주소를. ‘그럴 수 있죠’라고 말은 하고 있으나, 내게는 ‘그래서 일은 하겠니?’라고 들려온다.
- 출근 가능 지역은 어디까지로 적을까요?
- 네. 한 시간 이내면 가능해요.
- 한 시간이면 서귀포예요. 너무 멀어요. 매일 출퇴근하기.
- 육지에서는 그렇게 다녔어요. 한 시간 이상.
- 후후. 육지 물이 아직 덜 빠지셨군요.
- 아하하 그런 건가요.
- 30분 이내로 잡을게요.
서쪽으로는 한림, 동쪽으로는 시, 도청까지로 적어둘게요.
이쪽도 매일 출퇴근하기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에요.
그렇다. 나는 아직 육지 물이 덜 빠졌다. 아직 제주 하늘이, 구름이 매일 달리 보이고 늘 보는 먼바다도 그날그날이 새롭다. 자연에 둘러싸여 있는 이곳이 아직, 좋다. 골목길에서 만나지는 귤밭도, 동백나무 울타리도 정겹다. 제주 사람들은 귤을 돈 주고 사 먹지 않는다고 한다. 우린 아직 귤을 사서 먹는 육지 물이 덜 빠진 제주 사람이다.
날씨가 애매해 겉옷을 일단 챙겨 들고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식당 안쪽 의자에 겉옷을 내려놓으며 ‘저 아일 두고 갈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하긴 했다. 오랜만에 먹은 보말칼국수의 국물 맛에 흐뭇해하며 한참을 걸어 나왔는데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식당 사장님이 내 옷을 들고 흔들고 있다. 역시나, 그랬다.
아 나의 나이 듦은 어디로 향해 가는가, 해가 더해질수록 촘촘하게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밀려난다. 어딘지 모를 곳으로. 단어가 머리 위를 뱅뱅 맴돌고 기억이 조각조각 흩어져 이어지지 않는다. 이대로 흘러가도 괜찮은 것일까, 나이의 숫자만 더해지고, 잃어가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아 괜히 억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