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책으로 할 수 있는 일들
부모님이 사시는 시골집은 작은 동네이다. 내가 내려가면 그 소식이 반나절 만에 온 동네에 퍼질 정도이다. 그래서 가끔 가보는 나도 어느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대충은 알고 있다. 지금 집은 1년 전쯤에 이사한 집이다. 엄연히 이사지만 전에 살던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이다. 옆집이나 마찬가지인데, 이사 올 당시 30초 거리에 사는 베프 아주머니들이 서운하다고 눈물을 흘렸다는 후문... 암튼 이 동네 분들의 우정은 남다르다. 물론 다툼과 갈등이 늘 상주하지만, 해결할 것은 해결하고 그냥 둘 것은 내버려두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
새로 이사 온 집 옆에는 80대 할머님이 혼자 사신다. 할머니는 서울에서 이 동네로 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오자마자 버스로 40분 거리에 있는 노인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한글을 모르고 산 세월이 너무 길었다고.... 코로나가 터지기 전 약 1년 가까이 학교에 다녔고 이제는 글을 읽으신다. 어머니는 내가 갈 때마다 할머님 글씨가 너무 이쁘고 가지런하다고 자랑삼아 말했고, 옆에 있던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가만히 웃으셨다.
얼마 뒤, 할머님이 드디어 자신의 공책을 내게 공개하셨다. 창피하다는 말을 100번쯤 하신 것 같다. 그 뒤로는 내가 갈 때마다 공부를 하다가 궁금한 점을 물으셨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코로나로 3개월 가까이 학교에 가지 못해 답답해하시기에, 지난 달에 그림책과 동화책 열댓 권을 가져다 드렸다. 할머니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읽고 쓰기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책을 드린 다음 날 아침, 할머니가 나를 보자마자,
"어제 자네가 준 책을 읽느라 세 시간밖에 못 잤네. 세 권이나 읽었어. 참 재밌더만. 그동안 책이 한 권밖에 없어서 같은 걸 쓰고 또 쓰느라 재미없었는데, 자네 덕분에 내가 호강하네. 고마워."
그리고 엊그제, 한 달 만에 만난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내가 책을 세 번씩 읽고, 한 번씩 다 써봤네.”
그새 반복해서 읽고 또 읽고, 필사까지 하신 거다.
"벌써요? 와. 할머니 정말 대단하세요. 뭐가 재미나셨어요?"
"그 장애인 나오는 이야기(가방 들어주는 아이)를 보고 맘이 짠했어. 어떻게 그 장애인들의 마음, 아 그리고 그 옆에서 그 아이를 돕는 친구 마음까지... 나가 그거 보고 장애인의 마음을 알았다니께. 아주 심리를 잘 그렸더만."
나는 할머니의 소감이 감동적이라 몇 초간 말을 잊지 못하다가,
"아, 그 작가 분이 장애인이에요. 그래서 더 실감나게 쓸 수 있었나 봐요."
"그래? 그랬구만.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모를 것 같은 마음을 잘 아는구만. 나는 이 책을 보기 전에는 장애인들이 힘들겠다 (막연히) 생각했는데, 이제 더 많이 알게 되었어."
"그래서 책이 좋은 건가 봐요. 저도 책 보면서 그런 걸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맞아, 맞아. 그래서 책이 좋은 거야."
책에 이어, 할머니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셨다.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가지가 곧게 자랄지 휘어 자랄지, 올해 감나무의 감은 맛이 있을지 없을지, 죽순을 손질하고 삶는 법, 각종 꽃과 풀 이름, 상추씨 받는 법, 그리고 할머니의 사연과 자녀들 이야기,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생각하는 마음과 걱정들...
할머니의 구술은 책 그 자체였다.
서펑집에서 정보책, 에세이까지 각종 분야를 넘나들었다.
어제 집에 돌아와 짐을 풀었다. 가방에는 어머니와 할머님이 1시간 동안 까 준 마늘이 들어 있었다. 나는 손 맵다고 저리 가라 하셔, 염치없이 옆에서 놀고.
집에 돌아와 마늘을 보니, 두 어른 생각이 난다.
어른이 계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책만큼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된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묻고 답할 때,
그것을 다 글로 옮기고 싶은 욕심이 들 때가 있다.
뭔가가 스쳐지나 사라지는 게 아깝고 아쉽다.
책을 읽을 때 좋아 보이는 알맹이만 쏙 빼먹으려는 마음 같달까?
나쁜 마음은 아니다.
인간은 그렇게 성숙하는 거니까.
다음번에도 할머니에게 책을 몇 권 선물해야겠다.
무슨 책을 고를까, 왠지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