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서의 하루
00년 늦가을 금요일의 밤
나는 집에 가지 않고 친구들과 어딘가 가고 있었다. 친구와 서로의 집에서 잔다고 양쪽 부모님께 뻥치고 설레는 맘으로 떠난 곳은...
여의도 KBS 앞.
이 일은 지난 예식장 예도 알바에서 나에게 나레이터 모델 에이전시를 소개해주었던 그 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언니가 우연히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연예인들도 가까이서 보고 시급도 높으며 12시가 넘으면 택시비까지 준다는 것이었다. 언니는 당시 인기 많았던 '논스톱'이라는 시트콤을 몇 차례나 촬영했고 미니시리즈도 찍었다고 했다. 옷을 두세 벌 싸가서 중간중간 갈아입어야 하는 것과 (똑같은 엑스트라로 보이지 않게 캐주얼, 정장 다른 느낌의 의상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기다림이 많은 것이 단점이지만 TV에서 주인공 옆을 지나가는 자신을 찾는 재미도 있고 어려운 일은 하나도 없으니 한번 해보라며 나를 부추겼다.
늘 돈이 부족했지만 간호학과의 경우 방학 때는 항상 병원 실습을 4주 이상 했고 학기 중에도 가끔 보건소등에서 실습수업을 했기 때문에 시간을 맞추기 힘들어 정기적인 일을 하기 어려웠다. 언니말로는 에이전시에서 불러줄 때 시간 봐서 나갈지 말지 결정할 수 있으니 일단 이번 주말에 해보라고 내게 담당자 연락처를 주었다. 마침 일이 있다고 해서 친구들과 같이 하겠다고 했는데 어라! 언니 말과는 다르게 옷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한밤중에 KBS 앞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방송국 앞에는 KBS 로고가 크게 쓰여있는 전세버스 두 어대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대기하고 있었다. 자정이 되자 누군가 우리를 버스에 태우더니 문경이라는 곳에 가서 9시부터 촬영한다고 이야기해 주었고 우리는 무슨 드라마인지도 모른 채 수학여행 가던 때를 생각하며 그저 즐거운 맘으로 떠났다.
전세버스가 한참을 달리는 동안 우리는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동트기 시작 할 무렵 버스는 멈췄고 아직 잠에서 덜 깬 채로 차에서 내렸더니 누군가 우리를 일렬로 줄 세웠다. 하품을 하면서 줄 서는 동안 엑스트라 관리자가 빠르게 앞을 지나가면서 손가락으로 우리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나이! 나이 물어보길래 나와 친구는 20살이요! 20살이요 했는데 우리만 나이를 얘기하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알고 보니 거기 서있는 사람들 중 나이 어린 여자들에게 '궁궐 나인' 하라고 역할 알려주던 것이었는데 잠이 덜 깨 잘 못 알아듣고 헛소리 했던 것이었다. 둘러보니 중년의 아주머니들(흑! 내가 지금 그 나이), 나이가 많은 아저씨들도 계시고 우리 같은 20대도 많았다. 역할이 정해지자마자 우리를 다른 버스 데려가더니 역할에 맞게 헤어분장을 시작했다.
나는 평소 이마가 넓고 헤어라인이 동그랗지 않아 늘 이마를 살짝 가리며 다녔었는데 '토마토'라는 드라마에서 김희선 언니가 머리띠를 크게 유행시켰을 때에도 절대 따라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 나의 취향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꼬리빗과 헤어젤로 잔머리 한 올도 용납되지 않은, 눈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아주 바짝 잡아당긴 올빽 올림머리를 해주셨다. 메이크업은 각자의 몫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온 우리는 그냥 허여멀건한 생얼과 분장팀에서 해주신 올빽머리, 역할에 맞게 나누어진 의상으로 고려의 나인이 되었다. 우리가 촬영할 드라마의 이름은 당시 엄청난 인기였던 '태조 왕건'이었다.
저 멀리서 나와 친구의 올빽머리를 비웃으며 다가오는 고려 병사 두 명. 우리와 같이 아르바이트하러 왔던 동아리 친구들 역시 역시 머리카락을 바짝 올려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시킨 후 전투모를 썼고 얼굴에는 턱수염이 그득했다. 서로의 웃긴 모습에 정신 못 차리게 웃던 중 조감독이 지나가면서 '키 큰 나인 궁예 오른쪽에서 부채를 들고 있도록 해' 라며 내게 파초선 같이 커다란 부채를 쥐어줬다.
헉! 엄마 아빠한테 말 안 하고 온 건데! 우리 엄마 아빠가 태조 왕건 완전 열심히 보시는데! 궁예 옆에서 부채질하면 엄마 아빠가 나를 알아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갑자기 내게 맡겨진 부채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나를 대신해 궁예 옆에서 부채를 들고 있어 줄 사람 있나 나인으로 정해진 사람들에게 전부 물어봤다. 아까 분장실에서 MTM 연기학원에 등록해 두었다고 소개했던 아이가 자기가 부채나인 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이런 촬영하게 될 줄 모르고 어제 비싸게 주고 매직했는데 미용실에서 한 이틀 머리 묶지 말라고 했지만 이렇게 단단히 묶이고 틀어 올려져 파마한 돈 날렸으니 조금이라도 TV에 나와야겠다는 것이었다. TV에 나오면 안 되는 나와 조금이라도 나오길 바라는 그 애, 우리 사이에 커다란 부채가 오고 간 후 나와 친구는 맨 뒷줄에 섰다.
중요한 법회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신분 순서대로 앉아있던 곳에 궁예를 포함한 가족들과 수행원, 나인들이 커다란 문을 통과하여 입장하는 것이 우리의 첫 촬영이었다. 군사가 된 친구들이 긴 창을 들고 엄숙하게 서 있는 앞을 나인으로서 지나갈 때 서로 의식하느라 웃겨 죽을 뻔했지만 이렇게 규모가 큰 촬영이 나의 웃음으로 중단되면 큰일이겠다 싶어 고개 숙인 채 이를 악 물었다.
자리에 앉은 궁예가 석가모니는 자신의 영험한 수행의 결과를 가로챈 도둑이고 진정한 미륵은 궁예 자신이니 앞으로 본인이 만든 법전만 읽어야 한다고 근엄한 목소리로 선포하였다. 그다음 신을 찍기 전 조감독이 법당 안에 앉아있는 엑스트라 모두에게 촬영을 시작하면 양 옆을 서로 쳐다보며 웅성웅성 해달라고 했다. 앞서 찍은 궁예가 미륵임을 선포 한 이후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었다.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앞자리에 앉아있는 중요배역의 배우들은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었고 뒷줄에 쭉 앉아있던 엑스트라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누구나 할 것 없이 정말 "웅성 웅성" "웅성 웅성"이라고만 이야기해서 그 옆을 지키고 있던 친구는 터지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고 했다.
법당 마당에 모두 서서 고개를 숙인 채로 궁예가 가르쳐 준 법문 '옴 마니 반메 훔'을 수십 번 외치는 장면도 기억에 남았는데 누군가 자꾸 옴 마니 반메 홍!! 하고 마지막 글자를 크게 잘못 외쳐 여러 번 웃음이 났었다. (나중에 방송으로 확인해 보니 이 장면은 나오지 않아서 아쉬웠다.)
촬영장의 유일한 단점은 너무너무 추웠다는 것이다. 늦가을임에도 불구하고 발이 꽁꽁 얼마큼 추워서 사극 엑스트라 여러 경험해 본 어른들은 양말 위에 비닐봉지로 감싼 후 버선과 고무신을 신으면 낫다며 비닐봉지를 나누어 주셨다.
재미있었지만 춥고 배고파하며 여러 개의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분명 올 때는 넉넉했던 좌석이 꽉 차서 앉을자리가 많이 부족했던 것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일주일에 두 번 문경 세트장에서 촬영하는데 이전에 촬영 때 내려와서 며칠 노숙 후 다음 촬영버스로 올라가는 아저씨들이 계셔서 간혹 자리가 모자란다고 했다 ㅠㅠ 그 추운 세트장에서 며칠간 노숙을 하신다니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은 잠시... 피곤한 상황에 서울까지 바닥에 대충 기대앉아 가게 만든 아저씨들이 얄밉기도 했다.
그날 우리가 하루 종일 찍었던 것은 태조왕건 66화 44분 정도부터~ 67화 11분 정도까지 약 15분 정도의 분량이었다. 하루 종일 찍고 15분 정도라니! 고려에서 보낸 하루 아르바이트비는 세금 떼고 4만 7천 원 정도였는데 당시 아르바이트비 치고는 높은 편이었다. 도대체 드라마 한 편을 찍으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걸까.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나도 TV에 나올까? 부채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거의 끝자리에 서 있던 터라 엄마 아빠는커녕 나도 나를 찾기 힘들터였다. 그래도 태조 왕건이 하는 날마다 엄마 아빠 옆에 앉아 아는 장면이 나오는지 유심히 보다가 드디어 2000년 11월 12일 66회의 끝부분에서 내가 아는 장면이 나왔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엄마한테 '엄마 이제 궁예가 자기가 미륵이라고 한다!' 했더니 엄마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셨다. 나는 '학교에서 배웠어 :)'라고 하고 엄마 옆에서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뭐가 웃기다고 저래 조용히 하라고 하셨을 뿐 전혀 눈치채지 못하셨다.
6일을 기다려 67회도 엄마 아빠와 함께 시청했는데 나와 친구들이 잠깐이라도 나올지 구석구석 열심히 살펴보았지만 우리는 정말 배경이나 다름없어서 찾을 수가 없었다. 심각하게 시청 중인 엄마 아빠 옆에서 혼자 삐져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고 기억나던 대사를 중얼거렸던 2000년의 11월을 떠올리며 오늘 나는 KBS 홈페이지에서 태조왕건 66회, 67회 일부를 시청했다. 엄마가 뭘 보는 건지 궁금해서 곁에 온 아이들에게는 당당하게 얘기해 주었다.
'엄마가 TV에 데뷔했던 작품이야'
ㅋㅋㅋㅋㅋ
(그때 고려병사 출신이었던 아빠도 같은 날 데뷔했단다)
궁금하실까 봐 영상 링크도 올려봅니다
KBS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