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식장 예도
99년 당시 내레이터 모델이라는 직군이 있었다. 주로 새로 오픈한 대규모 매장 앞에서 현란한 춤솜씨, 특유의 억양과 목소리 톤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끌어모으며 제품이나 매장을 홍보하는 일을 했다. 나는 부끄러움이 많고 심한 몸치라서 내레이터 모델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같은 과 언니 소개로 에이전시에 등록만 해두었다.
99년 가을, 에이전시에서 주말 예식장아르바이트를 소개해주었는데 엘리베이터걸과 예도 중에 원하는 것으로 고를 수 있었다. 나는 말 안 해도 되는 예도 업무를 골랐고 곧바로 칼 잡는 법, 신랑 신부 입장 때 맞은편 사람과 칼을 교차한 상태에서 들어 올리는 법, 신랑 신부 퇴장 때 폭죽 나팔 터트리는 법 등을 배웠다.
역시 쉬운 일은 없었다. 칼이 제법 무겁기도 했고 맞은편 사람과 함께 칼 끝을 맞대고 입장에 맞춰 칼을 들어 올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 두 번 연습해 보고 바로 예식에 투입된 나는 아주 짧은 치마 제복 함께 엄청나게 큰 깃털이 장식으로 달린 모자를 착용해야 했다. 제복과 모자... 거기에 긴 칼을 들고 있으니 예식장에서 제일 시선을 끄는 사람이 되었다. 엘리베이터 걸 할걸...
연습을 했어도 칼끝을 맞대고 올리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나는 맞은편 알바언니와 박자 맞춰가며 올린 것 같은데 경험자인 그 언니 입장에서는 나를 컨트롤하느라 힘들었었나 보다. 신랑신부가 주례 앞에 서면 우리는 양가 부모님 인사 끝나고 하는 케이크 커팅을 준비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는데 그 언니가 입은 벌리지 않고 이를 악물며 낮은 목소리로 '카를 왜 그르케 드러(칼을 왜 그렇게 들어)' 으르렁 거리며 내 옆을 지나갔다. 그렇게 드는 게 뭔데! 뭐가 잘못인지도 모른다고요 ㅠㅠ 하필 저 무서운 언니와 짝이 되었다니 역시 혼자 하는 엘리베이터 걸을 했어야 했어... 눈치 보며 케이크 커팅을 도왔다.
이제 퇴장만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신랑 신부 옆에서 폭죽 나팔을 부는 일! 퇴장음악이 나오면 바로 폭죽이 터지고 이 순간에 사진작가가 사진을 찍기 때문에 (엄청 큰 필름카메라라 연속촬영이 불가했다) 가능하면 박자를 맞춰 동시에 터트려야 했다. 이때의 주의점은 나팔이 아래로 향하면 폭죽이 흘러내려서 사진이 안 예쁘고 위로 향하면 너무 멀리까지 날아가 나중에 치울 때 힘들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양 옆에서 나팔을 부는 거니까 각도도 잘 맞추고 터지는 순간도 잘 맞춰서 대칭이 되는 사진이 나오는 것이 신랑신부 입장에서는 좋겠지. 같이 일하던 무서운 언니가 "저분들한테는 가장 특별한 날인데 우리가 잘해야지!"라고 얘기했다. 맞다. 나는 일당 2만 원으로 잠시 일하러 온 거지만 저분들은 평생 기억에 남는 날인 거다! 실수 없도록 나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언니와 눈짓으로 박자를 맞춘 뒤 동시에 펑!! 폭죽을 터트렸다!
그 순간 식장의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고 신랑 신부는 더 활짝 웃고 행복한 기류가 식장안에 가득 넘쳤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지만 감상에 빠질 수 없다. 빠르게 움직여 폭죽에서 튀어나온 반짝이는 리본들을 주워 담아야 다음 예식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서너 개의 예식에서 예도를 하고 마지막 예식 후 피로연장에서 갈비탕을 먹었다. 정신없는 하루여서 그랬던건지 잔칫상이라 그런건지 들뜬 마음으로 갈비탕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예식장 안을 떠돌던 행복한 흥분들이 나에게도 전해졌던 특별한 하루였지만 엄청난 깃털 모자를 다시 쓰고 싶지 않아서 예도알바는 하지 않았다. 단 하루 일한 거였는데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작은 퍼포먼스 하나로 그 공간의 모두가 행복해하며 술렁이던 모습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 중에 99년 가을에 결혼했고 깃털 모자를 쓴 예도 아가씨가 결혼사진에 있다면 그게 저일지도 모릅니다. 히히히 저도 맘속으로 축하드렸답니다.
지금도 행복하게 살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