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걸로 서럽게 하지 마세요
내가 경험한 두 번째 아르바이트는 역 근처 영화관 건물 1층 배스킨라빈스였다.
시급은 1800원, 당시 학식이 1700원이었는데 싱글레귤러 아이스크림 한 덩어리가 1300~1500원 정도 했었다. 가난한 대학생에게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은 사치였기 때문에 여기서 일하면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으려나?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근무시간은 평일 오후 6시부터 마감까지 (11시, 가끔 30분씩 넘어가기도 했다)였는데 문제는 학교 수업이 보통 5시에 끝난다는 것이었다. 우리 학교에 간호학과가 가장 나중에 생긴 학과여서 간호학과 건물이 가장 외진 언덕에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사물함에 무거운 전공책들을 넣어두고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가도 이미 버스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엄청났다.
그 많은 학생들과 함께 만원 버스를 타고 아르바이트하는 영화관 앞에 오면 이미 5시 50분쯤이라 밥 먹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초코다이제스티브를(그때는 다이제가 아니라 다이제스티브였지) 하나 사서 며칠간 아르바이트 들어가기 전에 2조각씩 먹는 걸로 저녁을 때웠다.
아르바이트의 첫날이었던 1999년 6월 1일은 사장님, 인수인계를 위해 출근한 (내일이면 안 나올) 알바언니와 나, 셋이 있었는데 언니가 손님이 없는 틈틈이 아이스크림 컵의 종류와 각 컵의 무게, 아이스크림 담는 요령, 케이크가 보관되어 있는 창고 가는 길까지 전부 알려주었다. 영화가 끝나는 시간마다 손님은 물밀듯이 밀려왔고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일했더니 마감시간이 다가왔다.
언니와 함께 마감 청소를 한 후 매장 바닥을 닦은 대걸레를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청소 전 매장 한쪽 구석에서 꺼내온 새 걸레가 시커메져있었다. 화장실에서 작은 양동이를 꺼낸 언니가 나를 보고 오늘은 내가 할 테니 내일부터 직접 하면 된다고 잘 보고 따라 하라고 했다. 언니는 쭈그려 앉아 양동이에 주방세제 1, 락스 1, 세탁세제 1 스푼씩 넣고 섞은 것을 걸레에 뿌리면서 손빨래하기 시작했다. 원수의 머리채를 잡은 듯 꽉 잡고 바닥이 빨래판인 양 힘차게 문지르고 또 문지르다가 시커먼 땟국물이 줄줄 나오면 헹구고 또 비비고 헹구고를 반복하다 보니 새 걸레처럼 하얀 걸레가 되었다. 6월의 첫날이라 새 걸레를 꺼낸 게 아니라 매일 새것처럼 빨아둬야 하는 거였구나... 앞으로 힘들겠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음날부터 나는 사장님과 단 둘이 매장을 지켰는데 사장님은 업무구역 구석에 앉아 책을 읽거나 전화통화를 하셨고 정말 웬만큼 바쁘지 않고서는 아이스크림 스쿱을 손에 잡지 않으셨다.
혼자 고군분투하며 한 무리의 손님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주고 잠시 숨 돌릴 틈이 생겨 앉을라치면 사장님은 거울 닦아라(당시 배스킨라빈스 인테리어는 내부 벽면 일부가 거울이었음), 아이스크림 콘 빼놔라(콘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빼서 배스킨라빈스 로고가 있는 종이고깔을 끼우는 일) 등등의 잔 업무를 계속 지시하셨다.
지금의 내 나이쯤 되는 사장님은 내가 저녁을 먹을 시간이 없이 바로 온다는 것을 알고도 잠시도 쉴 틈을 안 주셨고 일을 함께 하지는 않으면서 매장을 비우지도 않으셨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몰래 먹을까 봐 그러시나 싶을 정도로(그때의 나는 키 170에 48~50kg의 늘씬한 몸이라 식탐 있어 보이지도 않았음) 화장실도 순식간에 다녀오셨다. 딱 한번 사장님이 아이스크림을 먹어보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 '워터멜론 아이스'라는 새로운 맛이 나왔을 때 손님들이 물으면 맛 설명을 해야 하니 먹어보라며 맛보기 스푼으로 딱 한 입만 주셔서 치사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님의 고등학생 아들이 친구와 함께 왔다. 쿼터컵에 넘치도록 아이스크림을 가득 담던 사장님이 실수로 바닥에 한 스쿱 떨어뜨렸는데 떨어진 아이스크림이 아까우니 나보고 숟가락 꺼내서 윗부분만 걷어 먹으라고 한 순간 그동안의 설움이 내 안에서 폭발했다. 너무 어이없어서 대꾸도 안 하고 아이스크림을 버리고 바닥을 닦았다.
그동안 혼자 힘들어도 참고 참았다. 바닥이 가까워진 아이스크림은 엄청 딱딱하기 때문에 스쿱으로 동그랗게 굴린 모양을 잡기 어려운데 처음에는 힘주는 요령이 없어서 오른쪽 엄지 손가락 아래가 전부 멍이 들어 수업 중 필기하는데 지장이 있을 정도였었다. 멍든 손을 가지고도 매일 밤 새 걸레가 될 때까지 비벼 빨았는데... 새로 시작한 드라마에서 전지현이 배스킨라빈스 아르바이트생으로 나와 괜히 뿌듯해서 참았는데 이젠 참을 수가 없었다. 자기 아들 주려다 바닥에 떨어뜨린 아이스크림을 먹으라니 누굴 거지로 아나!!
다음 날 나는 무단으로 결근하고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렇게 마무리하면 안 된다는 것이라는 걸 그때도 알았지만 사장님께 타격감을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사장님이 전화로 온갖 악담을 다 퍼부었는데 친구가 대신 받아 네! 네! 죄송합니다. 대신 말해줬다. '나한테 하는 욕 아니니까 괜찮았어'라고 해준 친구는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러 갈 때도 같이 가주었다. 무단결근은 내가 잘못한 것이니 죄송하다고 사과드리고 나왔다.
마감시간이 매일 다르기 때문에 전날 근무한 시간을 다음날 수첩에 적어둔다. 무단 결근하고 그만둔다고 말한 전날에도 마감까지 근무했으니 하루치 일당이 덜 적힌 걸 사장님도 알지만 주지 않으셨다. 그래봤자 9000원인데...
바로 지역소식지에 그 매장 평일 오후 알바를 구한다는 글이 올라와 같은 과 친구가 전화했지만 그 대학 간호학과 학생은 알바로 뽑지 않는다고 하셨단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그 친구에게 너를 내가 구해준 거다라고 장난치며 그때 내 손 멍든 게 아이스크림 푸다가 그런 거야 알려줬었다.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일이 힘든 건 참아냈지만 나를 막 대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누군가를 직원으로 써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내가 겪었던 서러운 일들을 절대 잊지 말고 서운하게 하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었었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나는 사장님이 아니라 아르바이트생으로 있지만 내가 일하는 곳들은 나를 존중해 주셔서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고 특히 먹을 것으로 치사하게 굴지 않은 곳이라 매우 만족하며 일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매일 메뉴가 바뀌는 직원 식당 만세!! 간식 챙겨주시는 대표님들 만세!)
힘들게 운영하는 사장님들의 마음을 생각하며 내 일처럼 열심히 하게 된 것은 이전의 경험들이 서툴었던 나를 조금씩 제대로 된 인간으로 만들어줬기 때문인 것 같다. 미숙하고 철없던 시절의 나를 데리고 일하셨던 모든 사장님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사장님도 직원들도 웃으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를... 그래도 사장님들 먹을 걸로 섭섭하게 하지는 말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