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같은 꽃은 없다.
13년 전쯤? 화훼장식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꽃을 배우기 전의 나는 일하면서 받은 상처 때문이었을까 작은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나고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였다. 뭐든 다 싫었지만 특히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게 되거나 대화하는 것이 싫어서 사람 만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었다.
일을 쉬면서 앞으로 뭘 하고 먹고살아야 할까 고민하다가 제과 제빵학원을 다닐 때 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잠깐이었지만 참 재미있고 즐거웠지...라는 생각이 들어 꽃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화훼장식 기능사 자격증을 준비하며 몇 개월간 여러 가지 꽃을 만지고 다듬으면서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나 놀라웠던 기억이 난다. 무례한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를 꽃 배우는 몇 개월 동안 치유받은 기분이었다. 작은 상가를 임대해서 나만의 꽃집을 차리고 싶었지만 아직 빠르고 센스 있게 꽃을 다루지는 못해서 자격증만을 위한 배움보다 안목을 기르고 창업을 위한 배움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원하던 과정의 학원비는 매우 비쌌기 때문에 그 학원비를 벌기 위해 나는 또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일에 다시 뛰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몇 달 일해서 학원비를 벌어놓고 재도전해 봐야지 했던 계획은 쉽게 이루지 못했다.
내 나이에... 관련된 전공도 아닌 일을... 다양하지 않은 꽃(자격증 시험을 위한 학원에서는 시험에 나오는 꽃 위주로 실습을 하게 된다) 잠시 만져본 것으로 창업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지 않나... 하고 있는 일이 힘들어도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니까 박차고 나올 용기가 부족했다.
고단한 일상을 이어나가면서도 혹시나 나중에 내가 차릴 꽃집의 이름과 인테리어를 꿈꾸곤 했다.
"Come on spring!"
내가 차리고 싶었던 작은 꽃집의 이름이었다. 아주 아주 간소하게 하얀 벽면에 까만 선으로 2D스타일 그림만 그린 후 꽃을 가득 채워야지! 하며 내가 만든 꽃 사진을 오려 핸드폰 포토 에디터로 그렸던 기억.
플로리스트 까뜨린 뮐러 특강을 들으러 프랑스로 떠나는 날을 꿈꾸기도 했었지. 아네모네 줄기 사이에 보랏빛 무스카리를 업사이드 다운으로 잡고 포장지 없이 리본만 묶어 완성한 꽃다발은 처음 보는 디자인이라 매우 신선했다. 발레리나의 발끝 같아 보이는 무스카리 위에 단정하게 대칭 맞춘 리본이 아니라 무심하게 묶어낸 모양을 보며 '이게 바로 프렌치 시크인건가?' 생각했다.
벗어나고 싶어 했던 일을 계속하다 아이를 낳고 육아하면서 나는 더더욱 come on spring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정원이 있는 집에 이사해서 내가 좋아하는 무스카리와 백묘국을 심는 다던지 봄이 오면 유칼립투스와 아네모네를 사서 화병에 꽂아두면서 꽃 만지던 날들을 추억하곤 했다.
지난 5월 말 당근 알바에서 웨딩 꽃 장식 아르바이트를 구하게 된 것은 올해에 만난 아주 큰 행운이다. 그 옛날 화훼장식기능사를 따게 된 것은 이 순간을 위해서였나! 바로 6월 첫째 주부터 소규모 웨딩홀에서 다른 분들과 함께 버진로드 꽃 장식을 맡게 되었다. 다음 날 결혼하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실수 없이 예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했다. 오랜만에 꽃을 만지게 되다니! 감격스러웠고 너무 즐거웠다.
꽃으로 하는 일의 반쯤은 육체노동에 가깝다. 사장님이 꽃시장에서 구입해 오신 꽃들을 수레와 웨건을 이용해 옮겨 종류별로 세팅해 둔 뒤 화병의 물도 다 갈아줘야 하고 커다란 통에 물을 가득 채운 뒤 꽃꽂이에 필요한 오아시스를 담가놔야 한다. 오아시스가 충분히 물을 머금는 동안 이전 예식에 썼던 시든 꽃들은 다 정리하고 새로 온 꽃을 디자인하기 좋게 다듬는데 원예용 장갑이나 목장갑을 끼고 줄기를 훑으며 빠르게 잎을 정리한다. 꽃 정리하면서 나오는 쓰레기도 많고 예식장 곳곳에 떨어져 있는 잘린 줄기나 물에 젖어 붙어있는 꽃잎들을 빗자루로 싹 쓸어 담아 버려야 하기 때문에 마무리할 때는 허리가 많이 아파서 힘든데 신기하게도 힘들지가 않다. 꽃을 만지면서 정서적으로 힐링이 되기 때문일까? 누군가의 새로운 시작을 돕고 있다는 뿌듯함도 한 몫하는 것 같다.
아름다운 꽃을 좀 더 자연에 가깝게 아름답게 디자인하면서 내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누군가의 시작을 온 마음 다해 축복해주고 싶어서 최선을 다해본다.
매주 느끼지만 같은 꽃은 없다. 언제나 세상 하나뿐인 꽃들을 만나니까 늘 새롭게 어렵고 쉬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줄기가 탄탄하고 굵은데 꽃이 덜 피어서 휑하게 비어보이기도 하고 어느 날의 꽃들은 꽃머리만 크고 줄기가 약해서 작은 스침에도 부러지거나 원치 않은 방향으로 휘어지기도 했다. 내 앞에 있는 꽃들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최대한 살려 자연스러워 보이게 디자인해야 해서 매번 어렵다고 느꼈다.
갑자기 꽃 만지는 일이 육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같은 꽃들도 저마다의 모양과 각각의 개성이 다른데 나는 아이들의 개성과 장단점을 고려하지 않고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 이미 구멍 난 오아시스에 안 맞는 꽃을 꽂아두고선 오늘은 꽃이 별로라며 탓하듯 육아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이와 감정적으로 부딪치게 되면 아이의 개성과 장단점을 고려해서 대처해야겠다. 오아시스가 물을 충분히 머금고 있어야 잎과 꽃에 충분히 물을 올려줄 수 있듯이 항상 내 마음에 여유를 채워두어야겠다. 구멍 난 오아시스에 꽃을 꽂고 또 꽂으면 그 자리는 무너져 더 이상 꽃을 지지해 줄 수가 없다. 가끔씩 마음에 박히는 상처가 내 마음의 평화를 무너뜨리지 않게 꿋꿋하게 구멍을 메꿔야겠다...
힘들어도 힘들지 않아 행복한 마음 가득 담고 집에 가는 길. 아파트 화단 사철나무의 높낮이가 예뻐서 한참을 보았다.
역시 자연만큼 아름다운 건 없구나.
이번 주 결혼식을 올릴 신부님의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 설렘과 행복을 온전히 느끼며 우리가 만든 버진로드를 아름답게 지나길 바란다.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