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못 견디게 갖고 싶은 것이 생겼다.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이 많고 즉흥적이기도 하지만 나름 계획 적인 나. 나는 특히 어릴 때 못 했던 것을 기억해 두고 꼭 이루는 사람이다.
80년대 중반 집 앞 성당은 나의 놀이터였다. 성당 안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앞마당에서 뛰어놀며 기도 중인 엄마를 기다리는 것이 중요한 하루 일과였다. 밖에서 노는 것이 지겨워지면 성당 안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 들어간다. 거기엔 내가 원하는 게 있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아가다 언니'가 길고 예쁜 손으로 매일 타자기를 치고 있었는데 검은색의 멋진 타자기였다. 내가 너무나도 간절한 표정으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가끔 선심 쓰듯 버리는 종이를 끼워서 한 번 타이핑하게 해주기도 했다. 아직 글을 모르는 까막눈에다가 손가락에 힘이 없어 제대로 치지도 못했지만 글쇠를 누르면 활자가 종이에 찍히던 그 순간의 기억이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힘없는 손가락으로 타자기 글쇠를 누르던 꼬마에서 미취학어린이 두 명을 키우는 40대의 주부가 되고 집을 조금 넓혀 이사한 지 4개월 만에 새로운 전염병이 시작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무서운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고 발병자의 동선을 체크하던 2020년. 아이들에게는 내가 세상의 전부가 되었기에 부지런히 책을 사서 읽어주고 새로운 게임을 익혀 놀아주며 세끼 챙겨 먹이느라 나는 소비되고 또 소비되었던 어느 날 갑자기 생각이 났다.
내가 타자기를 갖고 싶어 했었다는 것을...
아이들 식사와 간식만 생각하며 나를 소비하던 그때 나에게도 지친 마음을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타자기가 바로 그 필요한 무언가였다.
무작정 중고나라에서 타자기를 한 대 구입했다. 생각보다 작동법이 어렵지 않았지만 집중력이 필요하다. 아주 잠깐의 딴생각으로 고치기 힘든 오타가 생길 수 있는데 굳이 이 불편한 기계를 쓸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손가락을 거쳐 한 글자 한 글자 바로 종이에 인쇄되는 과정이 정말 매력적이라 멈출 수가 없었다. 심각하게 재미있다. 좋아하는 문장이 들쑥날쑥한 글씨들로 뒤바뀌어 나만의 것으로 소장되는 과정이 내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했다. 타자기라는 처음 보는 물건이 오고 엄마가 자꾸자꾸 타자기를 치자 아이는 신기해했다.
"엄마는 타자기 왜 치는 거야? 엄마는 나중에 작가 될라구?”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말 작가가 되고 싶어졌다. 다른 사람의 글을 타이핑하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데 나의 글을 타자기로 인쇄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아이의 말 한마디에 불타오른 창작욕구가 글을 쓰게 했다.
2023년 늦가을. 아빠가 오랜 지병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일주일,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자마자 아빠가 계신 병원에 갔고 몇 시간을 울다가 집에 오면 내 안의 슬픔을 토해낼 곳이 없어 종이에 쏟아냈었다. 아빠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 후회했던 일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아빠와의 작은 일상들까지 하나라도 잊지 않게 생각나는 대로 타이핑했었다.
그때의 경험을 써냈던 글로 브런치 작가가 된 나는 내 이야기를 몇 편 썼다. 어린 시절과 가족에 대한 글을 쓰면서 열등감 가득해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그 시절이 다르게 보였다. 내 안에 이야깃거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나는 많은 경험을 하며 자라왔고 충분히 사랑받았다.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이 조금은 더 성숙해진 것 같았다.
타자기가 너무 궁금하고 맘껏 쳐보고 싶었던 어릴 때의 로망을 40살이 되어서 이루었다. 불혹에 만난 타자기 덕분에 지금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록을 쓰고 있다. 그동안의 나는 열등감이 많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위로해 주려고만 했다. 이제 다 이뤘으니 그만하고 앞으로 나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