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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와 건빵

아빠에게 보내는 글

by 밍님

우리가 마당 넓은 저택에 세 들어 살았던 몇 년간 아빠는 가을이면 긴 장대로 커다란 대추나무를 털어서 대추 수확을 했었다. 대추가 가득한 커다란 나무 밑에 비닐을 여러 개 깔고 아빠가 장대로 나뭇가지를 흔들면 알 굵은 대추들이 쉴 새 없이 떨어졌었다. 나는 그걸 '일렁일렁'한다고 얘기했다.


나뭇가지들이 장대에 의해 유연하게 흔들리던 모습, 동글동글 탱탱한 열매들이 비닐 위에 떨어지는 모습들이 내게는 물이 출렁출렁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나 보다. 군데군데 자줏빛 얼룩이 있는 연두색 대추들도 있었고 완전한 자줏빛 열매도 있었다. 아빠가 대추를 터는 날은 우리 집과 주인집 식구들 모두 모여 떨어진 대추를 주워 담았다. 어린 나는 아빠가 '일렁일렁'하는 게 참 자랑스러웠다. 큰 마당이 있는 저택의 주인이자 대추나무의 주인인 의사 아저씨는 그냥 구경만 했으니까 우리 아빠만 할 수 있는 거로 생각했다. 매일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장난감만 갖고 노는 주인집 언니한테 "언니네 아빠는 일렁일렁 못 하지!"라고 했는데 언니가 그날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섰었다.


아빠는 매일 저녁 따뜻한 집에서 휴식하는 일상을 가질 수 없었다. 매일 밤 아빠는 누룩이 발효되는 향이 가득한 양조장 옆 작은방에서 외로움과 싸우셔야 했다. 산과 맞닿아있던 넓은 민속촌. 북적이던 손님들도 돌아가고 그 많던 직원들도 6시면 퇴근 버스와 함께 대부분 집에 돌아갔으니 보글보글 술 익어가는 소리와 고양이 소리 말고는 지독히 조용하고 심심하며 기나긴 밤이었을 것이다.

일주일 중 하루 쉬는 날, 설레는 하루였을 텐데 아빠 없는 일상에 익숙해진 우리는 아빠가 집에 오시는 날이 불편했다. 좁디좁은 집에서 아빠는 환영받지도 못한 채 양조장 작은방에서의 외로움과 다른 고독한 밤을 보내셨다. 몇 년 뒤 내가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아빠는 제주도에 일하러 가셨고 1년에 두어 번 집에 오셨다. 아빠가 보내준 연둣빛 바나나 송이들은 우리 집 안방 가장 따뜻한 곳에서 이불까지 쓰며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2년여 정도 지내고 돌아온 아빠는 다시 양조장 작은방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셨다. 아빠는 젊었을 때 방탕했던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엄마와 우리는 늘 가난하게 살았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가족 여행으로 바다 한 번, 아니 하다못해 다 같이 중국집 한 번 가본 적 없었던 나의 유년 시절. 초라하다고 생각한 그 시간이 큰 열등감이 되어 아빠의 긴 외로움은 생각하지 못하고 내 앞의 곤궁함만 너무 아픈 사람으로 자랐다. 나는 오랫동안 아빠의 삶을 가볍게 읽고 지나친 소설 속 주변 인물의 일상쯤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의 오랜 투병에도 마음을 다해 걱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빠의 안위가 궁금해서 먼저 연락한 적이 있었나. 과연 몇 번이나 그랬을까.

딱 하루.
아빠가 입원한 호스피스 병원에서 하룻밤을 보호자 침대에서 지낸 것이 딱 하루였다. 두 번이나 찾아온 뇌경색 때문에 인지기능이 떨어져 속 깊은 대화를 할 수가 없다는 걸 핑계 삼아 아빠와 대화하려는 노력도 별로 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아빠는 이미 청력이 좋지 않아서 천천히 크게 이야기해도 다 알아듣지 못했다. 그 밤 나는 창가 옆 보호자 침대에 누워 밤하늘을 보며 영화OST를 듣고 있었다. 아빠는 직장암이었는데 장루 수술을 거부하셔서 매일 변비와 설사를 동시에 겪어야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아직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혼자 움직이다가 다리에 힘이 없어 넘어진 적도 있으셨다. 보호사님과 간호사 선생님들이 몇 번이나 소변줄과 기저귀를 권했지만, 계속 거절하셨는데 내가 병실을 지키던 그날 아빠가 소변줄과 기저귀를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조용히 말씀하셨다. 수영장도 목욕탕도 거의 안 가봐서 남에게 벗은 모습을 보이기 힘들다고.


주무시던 아빠가 주섬주섬 일어나 침대 밖으로 나가시려 했다. 화장실 다녀오시는 걸 도와드리고 다시 누웠는데 아빠가 건빵을 드시고 싶어 하셨다. 나는 또 화장실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일이 생길까 봐 "아빠 아까 저녁 드시고 드렸잖아요. 지금은 밤이 늦어서 안 돼!"라고 했다. 아빠는 " 우리 막내가 안 된다 하면 안 먹어야지."라고 하시며 잘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단지 아빠 곁에 있기만 했던 밤이 지나고 한 달 뒤 아빠는 병원을 옮겨야 했다. 아빠가 좋아하시던 정원과 성당이 있는 호스피스 전문 병원에서 산책이 어려운 준 종합병원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야 했기에 가족 모두 아쉬워했다.


병원을 옮긴 그날 오후 5시 30분쯤 아빠한테 전화가 왔는데 다른 때보다 더 기운 없는 목소리로 '잘 지내'라고 말씀하시고 금방 전화를 끊으셨다. 걱정이 된 나는 다음 날 오전에 전화했는데 보호사님이 받으셔서 아빠가 주무신다고 하셨고 몇 시간 뒤 보호사님이 아빠 핸드폰으로 전화해 주셨다. 자꾸 출근해야 한다고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시니 잘 말해달라고 하셨다. " 아빠! 이제 출근 안 해도 돼." 했더니 "안 해도 돼? 그러면 안 해야지." 하셨다. 다른 날에 통화할 때는 항상 막내 복소리 들어서 기분이 좋다. 사랑한다. 하셨는데 출근 안 해도 된다는 소리에 금방 전화를 끊으셔서,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다. 그런데 그게 아빠랑 한 마지막 통화이자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몰랐다. 아빠는 결국 의식을 잃으셨고 끝까지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의식을 잃은 아빠를 보러 가던 일주일 동안 병원으로 가는 버스에서 나와 아빠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아빠를 제일 좋아했을 때가 언제였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다 4학년~5학년 즈음 몇 달 만에 집에 오셨던 아빠가 제주도로 다시 가던 날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공항버스를 타러 가시는 아빠를 나 혼자 배웅했던 그날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던 길을 아빠 손잡고 걸어갔었지. 우만돈 집 언덕을 내려가서 궁전예식장을 지나 건널목 앞 신호등 기다리며 아빠가 제주도 안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손을 더 꼭 잡았던 그 순간이...


아빠와 함께 했던 순간들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고 아빠에게 계속 이야기했다. 아빠 기억나? 아빠가 대추나무 위에서 가지를 발로 흔들면 나는 일렁일렁한다고 했었잖아. 아빠가 일렁일렁할 때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몰라. 아빠 지금 이 소리 들려? 언제인지 모르는 어느 일요일 한낮에 아빠가 가져온 붐박스랑 마이크로 녹음한 노래들이야. 텔레비전을 끄지 않고 녹음해서 그날의 배구게임 중계 소리가 그대로 들려. 그래서 시끄럽지만 더 재미있지? 듣고 있어? 아빠가 긴 잠에 빠지기 전에 얘기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바보 같은 나는 아빠한테 얘기할 시간이 더 있는 줄 알았어.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빠의 시간들을 모른 척하고 싶었나 봐. 이기적인 딸을 용서해 줘.


아빠가 살아계실 때 나에게 아빠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어린 시절 가난함과 무서움을 줬던 모습만 떠올리고 여든 다 되도록 외로움과 싸우며 끝까지 가족들을 부양하려고 했던 아빠의 진심은 보이지 않았다. 아빠가 의식을 잃고 난 후에야 얘기할 시간을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마트를 지나가다 대추나 건빵을 보게 되면 대추나무 위에서 환하게 웃던 아빠가 생각나고, 곁에 있으면서도 다정하지 못했던 그때가 생각나 뜨거운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오늘도 난 그날 밤 아빠께 건빵을 드리지 못한 걸 많이 후회하고 있다.


아빠 미안해.

아빠의 긴 외로움을 모른 척했어요.

미안하고 미안해요.

아빠는 일렁일렁도 잘하는 멋진 아빠였고

아빠가 만든 동동주는 최고였어.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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