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2. Wham_Last Christmas
여전히 함께 보내는 연말
나 : 다들 지금 생각나는 단어 아무거나 3개씩 말해봐
H양 : 양말 산타 고구마
P양 : ㅋㅋㅋ
K군 : ㅋㅋㅋ
나 : 고구마 뭔데ㅋㅋ
H양 : 우리 회사 앞 편의점에서 파는 건데 냄새가 장난 아니야
그렇다. 사실 나는 올해의 마지막 수플레를 어떤 주제로 풀어내야 할지 불과 두세 시간 전까지 고민하고 있었다. 부끄럽지만 쓰고 싶은 글이 없다는 것은 생각이 없다는 뜻이 되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요즘 그 어떤 것도 나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니. 좀 답답한 마음에 냉장고에 있는 탄산음료 한 캔을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몇 시간을 소파에 기대어 TV 채널 여러 개를 돌려보며 영감을 찾아다녔지만 실패였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니 다급해진 마음에 핸드폰을 뒤적이는데, 마침 카톡 몇 개 올라오는 동기 단톡방에 급하게 SOS 요청을 했던 것이다.
아무튼 '양말 산타 고구마' 이 단어로 빵 터진 우리는 연말 근황을 주고받다가 올해는 연말 모임을 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요즘 핫하다는 줌이 생각났다.
"우리 그럼 그거 해보자 줌 채팅"
"아 그럴까? 그냥 우리 다 아이폰이니까 페이스 타임 하면 되네"
"콜"
저녁 9시까지 각자 먹을 안주와 술 한 캔을 준비하고 모이기로 했다. 급하게 배달의 민족에 들어가 오늘 내내 먹고 싶었던 곱창을 플렉스하고 후다닥 카메라를 세팅하고 나니 9시 땡!
"다들 준비됐니?"
P양의 칼 같은 9시 정각 초대로 우리 넷은 핸드폰에 달린 작은 카메라에 의존해 각자의 근황을 영상으로 뽐내기 시작했다. 정확히 10년 전, 발개지고 앳된 얼굴로 처음으로 '동기'라는 이름을 달고 시작한 인연들. PD가 되겠다고 신문방송학과에 왔다느니, 무조건 인 서울 해서 자취를 하는 것이 목표였다느니, 반수 하고 다시 신입생이 되었다느니. 찬란한 20대의 한편을 보낸 이들이 이제는 각자의 자리에서 남의 돈을 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그래서 점점 차갑고 이성적인 직장인이 되어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H양이 갑자기 이런다.
"우리는 가늘고 길게 가자"
가늘게 가는 건 뭐냐면서 한바탕 웃었지만, 이제는 그 말에 담긴 세월의 묵직함도 느껴진다. 예전 같았으면 가는 건 싫다며 무조건 우리는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하고, 굵직굵직한 사이만 의미 있는 거라면서 서운했을 텐데 이제는 이렇게 연말의 몇 시간을 할애해서 작은 채팅창을 통해서 함께 허허 웃을 수 있는 사이라는 것도 참 감사하다는 사실이.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겸허히 만들어주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올해의 마지막 12월 셋째 주 토요일,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 제가 가지고 온 곡은 Wham의 Last christmas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고, 수많은 뮤지션들이 본인의 목소리로 리메이크하기도 한 노래죠. 바로 이틀 뒤면 크리스마스잖아요. 작년처럼 북적이는 크리스마스는 없지만 캐롤은 꼭 챙기고 싶어요! 너무 좋은 캐롤이 많은데 저는 Last christmas가 제일 좋더라고요. 제게는 가장 캐롤다운 노래예요.
2020년 한 해는 저에게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와 함께한 일년으로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잘 쓰든 못쓰든 한 달에 한 편 꾸준히 써보자는 약속을 지키고 싶어 시작했는데 다행히 그 약속은 지켰지만요. 그렇지만 솔직히 제 글이 스스로 마음에 들었던 적은 손에 꼽은 것 같아요. 아마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다시 읽으면 쥐구멍이 숨고 싶은 기분이 들 테지만요. 그러나 올 한 해를 발판 삼아 내년에는 좀 더 꾹꾹 눌러 담아 적어보고 싶다는 오기도 생깁니다.
올 한 해 고생 많았어요 모두들 ♥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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