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훈 Dec 31. 2020

기억하지는 않아도 지워지지는 않아요

ep.43 장혜리 -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https://www.youtube.com/watch?v=KseqCLynFUM


 어느덧 내가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 매거진에서 쓰는 마지막 글이다. 그간 노래에 얽힌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사실 쉽지는 않았다. 내 이야기를 불특정 다수에게 꺼내어 놓는다는 것은, 그중에서도 노래와 얽힌 개인적인 사연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며 더군다나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지점과 숨겨야만 할 지점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찾는 일이기도 했다. 나에게 너무 빠져있지도 그렇다고 나를 가엾이 여기지도 않으며 내 이야기를 잘하고 싶었다. 당연히 실패는 동반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하고 싶었던 얘기들은 결국 못 꺼내기도 했고,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한 글도 많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써내기도 했고 나조차도 모르던 나를 발견하거나 의도치 않은 문장에서 내 글에 머물러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에 내가 소개했던 노래들이 담기고 더 가닿아 그 노래가 그 사람의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하다 보면, 글 쓰는 것 자체가 꽤나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나날 속에 안온해지기도 했다.


이런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던 경로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인생은 정말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 이맘때 코로나가 없던 시절, 나는 서로의 꿈을 물어봐주는 <마이 유니버스> 파티에 홀린 듯이 가서 수플레를 함께 만들어간 보니님과 주디님을 처음 만났었다. 낮은 조도 속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서로 간의 허무맹랑한 꿈을 진지하게 나눴던 기억이 난다. 각자의 우주가 팽창하고 맞닿으며 서로를 감싸안는 공간 속에서 나는 마음이 가득 풀렸었나. 평소라면 부끄러워서 못 뱉었을 말들을 생각보다 뻔뻔하게 했었다. 지구를 사랑하고 용기 있게 행동하는 마음을 가지고 싶다고. 사랑을 발산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 날 사람들은 그런 나의 꿈에 공감과 지지를 보내줬다. 목적 없는 애정을 담아 그들이 내게 보냈던 눈빛이 지금까지도 내 마음 어딘가에 포근히 둥지를 틀어 결국 내가 돼버리기도 했다. 그 날의 다짐과 환영 덕분이었을까. 정말로 나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묘한 힘을 얻어왔고  이전보다 용기 있게 행동하고 사랑을 사랑하는 한 해를 보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나의 용기는 어딘가 모르게 치졸했고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도 불완전했다. 나는 적당히 버틸 수 있는 만큼의 용기 속에서 움직였고 믿음을 믿는 일에 처참히 실패한 한 해를 보냈다.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내가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있는 친구와 서로를 찌르며 멀어지기도 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으며, 꼭 쥐고 있던 마음을 가차 없이 버리며 돌아서야 하는 시간을 관통하기도 했다. 1년 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게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나일까. 너의 말 한마디가 나를 만들고, 너의 포옹 한 번이 1년을 살아가게 하는 힘을 주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너로부터 만들어진 걸까. 내 몸의 세포들이 전부 교체되면 이전의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니 그전에 우리는 어디에서 왔지.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를 느낄 수 없었지. 어떻게 하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적어도 그런 고민들을 외면하지 않으려 이렇게 글을 쓰고 셔터를 누르는 사이 한 해가 꼬박 저물었을 뿐이고.


소설을 쓰고 사진을 남겨도 나는 여전히 세상이 무엇인지 모른다. 슬픈 것은 아름답고 상실 뒤에 새싹이 돋아나고 고통 너머에 새로운 길이 열리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죽음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죽음이 정말 슬픈 일인지도 잘 모르겠다. 죽음은 슬픈 거라 어릴 때부터 계속 보고 듣다 보니 어느새 죽음이 서글퍼진 것일지도. 모른다 모른다. 자꾸만 몰라진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오롯이 바라볼수록 세상은 내게 사진을 선물하고 노래를 들려주고 지혜도 가르쳐주지만 결국 나는 죽을 때까지 전체 그림을 볼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계속 보고 계속 사는 것이 정말로 괜찮을 태도일까. 우리의 시선이 모두 합쳐지면 전체 그림을 그려볼 수도 있을까. 우리는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나. 그런 고민을 하고. 그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고파지고. 밥을 먹고 쿨쿨 잔다. 자고 일어나면 내일은 오늘이 되어있고 나는 그렇게 매일의 오늘을 산다. 엄정화 님의 말대로 영원한 건 없어도 영원한 순간은 있지 않나 하고 엉덩이를 신나게 흔들면서.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유튜브 속 1988년의 장혜리 씨가 '기억하지는 않아도 지워지지가 않아요.'라고 열과 성을 다해 그 시절을 노래하는 것처럼 그런 글을 쓰고 그런 태도로 세상을 만지며 살고 싶다. 지나간 것들은 지나간 대로, 다만 지우지는 않고 잃어버려도 잊지는 않으며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기꺼이 겪으려 하고 내게 남아있는 사랑을 드리는 삶. 모든 것이 변해도 내 안에 감귤색 니트와 피리 부는 소년의 그림과 스쳐 지나간 모든 계절은 머물러있으니 든든한 마음으로 서로의 심지를 밝혀주는 삶. 봄이 오면 살랑거리며 아래로 춤추는 버드나무를 하릴없이 글로 담고, 겨울이 오면 시리도록 깨끗한 공기 위에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를 힘껏 열창하는 삶.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구독과 공감, 댓글은 더 좋은 매거진을 위한 원동력이 됩니다. 매주 수요일 '수플레'를 기다려주세요! (비슷한 감성의 음악 공유도 환영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전히 함께 보내는 연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