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7. 브라운 아이드 소울 - 그런 사람이기를
미국 댈러스 행 비행기. 첫 번째 식사 서비스와 기내 면세품 판매가 끝나고 한 차례 승객 레스트 시간. 어두컴컴해진 기내 아일(비행기의 복도를 보통 아일이라고 이야기한다)을 걷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좌석 등받이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계셨다. 아까 식사 서비스 때 비빔밥과 소고기 스튜 중에 무엇을 드실건지 여쭤보았는데 매운 건 잘 못드시고, 소화가 잘 안되서 밥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시길래 비빔밥을 드리면서 고추장은 아주 살짝 간만 맞춰서 드시라고 일러드렸던 손님이었다.
“손님 등받이 좀 뒤로 세워 드릴까요?”
“아…아…아녀요”
손님의 ‘아녀요’는 ‘등받이를 세우고 싶지 않다’가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 옆에 버튼을 꾹 누르고 뒤로 힘을 주시면 넘어가요. 제가 살짝 한 번 눕혀봐 드릴게요. 음 이 정도 괜찮으세요?”
“아휴 네 괜찮네. 음 아니 조금만 한 번 이거를 좀 더 해볼까?”
ㅎㅎ 귀여우셔라. 바로 뒤에 앉아계셨던 손님도 안 주무시고 비디오를 보고 계셨던터라 조심스럽게 조금 더 뒤로 넘겨 드렸다.
“이 정도는 어떠세요?”
“아휴. 딱 좋아 고마워요. 아니 그런데 여기 사랑의 콜센타 같은 건 안나오나?”
“사랑의 콜센타요??”
안타깝게도 사랑의 콜센타는 없었지만 마침 최근에 신규 TV 목록에 들어가면 인기리에 방영했던 <미스터 트롯>은 볼 수 있었다. 미스터 트롯을 틀어 드려도 되는지 여쭤보니 너무 좋다며 임영웅이가 아주 선해서 팬이라고 하시는 손님. 탑승하실 때 나눠드린 헤드폰도 어떻게 쓰는지 몰라 바로 옆에 비닐째 그대로 두고 계셨던 걸 내게 건네셨다. 아무래도 지나가는 승무원들에게 물어보기 쉽지 않아서 이런저런 불편함을 참고 계셨던 것 같았다.
죄송한 마음에 아일 옆으로 잠깐 쭈구리고 앉아서는 손으로는 헤드폰을 세팅하면서 말 동무를 좀 해드렸다. 큰 딸이 플로리다에 별장을 지었고 목회 박사인데 피아노를 잘 쳤다가 이제는 한 층 업그레이드를 해서 하프를 켜신다는 이야기, 손자는 의학박사인데 할머니가 오신다니까 7박 8일의 휴가를 내어 별장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셨고 그래서 댈러스 공항에 도착하면 데리러 온다는 그런 자랑. 그런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늘어놓으시다가는 갑자기,
“근데…참으로 편하게도 해주시네.”
“아이고 아니에요.”
순간 ‘참으로 편하게도 해주시네.’ 묵직한 고소함이 느껴졌다. 친절해라. 수고해라. 덕분에 잘 왔다. 고맙다. 기내에서 종종 이런 표현들을 들어봤는데 참 편하게도 해준다는 그 표현이 정말로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기분이었다.
내리실 적에 좋은 시간 보내고 오시라며 배웅하니 “고마워요” 라며 내 팔뚝을 두 번 누르고 가셨다. 방호복에 고글까지 쓰고 일하고 있어 우리끼리도 누가 누군지 바로 알기 어려울 때가 있는데, 괜히 손님이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주신 것 같아 끝까지 마음이 따스했다. 12시간 30분을 날아가는 동안 앉을 새가 없어 다리가 퉁퉁 부운 비행이었는데 그 피로가 녹는 기분이 들었다.
유투버 밀라논나는 우리나라 최초 이탈리아 유학생이자 패션 디자이너로 살고 계신 분이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을 덜 무섭지 않게 만들어주는 그녀가 최근에 <대화의 희열>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녀는 유희열에게 “젊은 여성들에게 롤모델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어떠세요?” 라는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긴장되죠.”
좋아요. 떨려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죠. 라는 말과 결이 아주 다른 것도 아니지만 몇 번을 돌려보게 만드는 힘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나는 이렇게 누군가의 삶에서 오래도록 완성되어 온 느낌이 드는 표현들이 참 좋다. 화려한 미사여구라는 생각도 들지 않고, 사람들 모두가 흔하게 쓰는 표현을 그저 같이 쓰고 있는 느낌도 아닌 본인의 삶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묵혀진 언어들을 말이다. 나이가 들면 찰나의 순간에도 그 사람이 보인다는 말의 힘이 이럴 때 마다 느껴지곤 한다. 나이 들면서 계속 다듬어질 나의 언어가 걱정이 되면서도 기대가 된다.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 9월 추석연휴의 끝자락과 맞물린 넷째주 수요일에 제가 들고온 곡은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명곡 중 하나 <그런 사람이기를> 입니다. 학창시절부터 브라운 아이드 소울을 참 좋아했어요. 새벽 라디오 듣기를 좋아하는 소녀였던 저에게 어쩌다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노래가 나오면 감미롭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멜로디에 취해 잠을 잊곤 했거든요.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노래들은 곡명도 참 예쁘지 않나요? 그런 사람이기를 도 그렇고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노래 중에 최애곡 '추억 사랑만큼' 이라는 곡명도 그렇고 오래도록 고맙도록이라는 곡명은 또 어떻고요. 오늘 써내린 글의 내용과는 큰 연관은 없지만 묵직한 언어 라는 제목을 붙여놓으니 자연스럽게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묵직한 노래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중 오늘 유난히 몇 번을 반복하게 되는 <그런 사람이기를>. 함께 듣고 싶었습니다 :)
개인적으로는 요즘 조금 다운된 시기를 보내고 있어요. 다행스럽게 추석 연휴 내내 쉬기는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다시 일상의 텐션을 되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저녁 이 노래를 들으며 따뜻한 차 한잔 마시며 내일을 위해 푹 쉬어보려고요. 다들 수이팅입니다^_^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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