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 밖의 답

<설계자의 전쟁론> 1부 3장 | 제31화

by 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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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3장. 작은 불꽃들

31화. 계산 밖의 답




추천BGM

출처 : Youtube_The Riverside Tavern 취향에 따라 들어주세요 :)


시커먼 연기가 수도원 입구를 집어삼킬 듯 뿜어져 나왔다.

화마(火魔)가 들이닥친 지옥도를 뒤로하고, 그 속에서 네 개의 그림자가 비틀거리며 튀어나왔다.


“콜록! 쿨럭! 후우…”


가장 먼저 기침을 토하며 뛰쳐나온 에드먼드가 매캐한 공기를 뱉어냈다.

그 뒤로 아르나바즈가 붉은 머리 아이를 안은 채 나타났고, 창백해진 셀라가 그녀의 옷자락을 생명줄처럼 쥐고 따라왔다.


“나왔다! 도련님이다!”

“오오!”


터너의 외침과 함께 대기하던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곰 같은 덩치의 가레스가 가장 먼저 달려와 에드먼드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아 흔들었다.


“다들 무사한가?”

“쿨럭… 보시다시피.”


에드먼드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으면서도 가레스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가장 두려운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가레스, 사망자는…”

“없다.”


가레스의 짧은 대답. 에드먼드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였다.


“예? 정말입니까? 단 한 명도?”


에드먼드가 넋이 나가 가레스에게 반문했다.

가레스가 딱 잘라 말했다.


“팔다리를 좀 깊게 베인 녀석이 다섯, 나머지는 가벼운 찰과상이다.”

“하아.”


그 보고를 듣는 순간, 에드먼드의 입에서 깊은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정규군도 아닌 징집병들이다.

그것도 요새화된 적을 상대로 한 야간 공성전이었다.


그런데 사망자가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전과였다.


‘해냈구나.’


공포를 이용한 심리전.

철저한 2인 1조 전술.

짧은 기간 뼈를 깎아가며 시킨 가레스의 훈련.

그 모든 것이 맞물려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그리고 그 기적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에드먼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병사들의 손끝에서, 병사들의 떨리는 무릎에서.

치열한 생존과 투쟁의 결과였다.


깊은 안도의 한숨.

그 무게를 덜어주기라도 하듯, 가레스는 툴툴거리면서도 에드먼드의 어깨를 짧게 두드렸다.


“운이 좋았군.”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가레스는 지체없이 병사들 사이를 오갔다.


투박한 손길로 지혈하고 붕대를 감아줬다.

의 손놀림은 이상할 만큼 정겨웠다.


처음 겪는 전장의 공포.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악감.


그 거대한 무게에 짓눌린 병사에게 가레스는 굳이 말을 던지지 않았다.


대신 어깨를 한 번 세게 눌러줬다.

‘괜찮다’라는 뜻이었다.

‘쉽게 죽지 마라’는 뜻이기도 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전장을 지배하던 사내.

그는 병사들의 무너지는 마음까지 단단히 결속해 주고 있었다.


병사들의 응급 처치를 마친 가레스가 터벅터벅 걸어와 에드먼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에드먼드의 피 젖은 옆구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옆구리에 그건, 전리품이냐?"

"하하…"


질린 듯한 가레스의 비아냥이었다.


에드먼드의 옆구리에서는 붉은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투쟁심이 솟구칠 땐 몰랐던 통증이 그제야 밀려왔다.

체온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뒤늦게 찾아왔다.


"으윽."

"비켜 봐."


아르나바즈가 다급하게 에드먼드의 튜닉을 걷어 올렸다.

상처는 깊었지만, 불행 중 다행이었다.


“갈비뼈에 걸렸어. 장기는 피했다. 지혈해야 해. 깨끗한 천이…”


아르나바즈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병사들의 옷은 피와 먼지투성이였다.


상처에 댈 만한 것이 없었다.

누더기 같은 천을 얹는 순간, 더 큰 열이 들 수도 있었다.


그때 그녀의 눈길이 한 곳에 꽂혔다.


멍하니 서 있는 백금발의 소녀, 셀라였다.

정확히는 그녀가 입고 있는, 아직 비교적 깨끗한 하얀색 속치마였다.


아르나바즈는 셀라 곁으로 성큼 다가갔다.

평소에 총기가 넘치던 눈동자가 흐려져 있는 틈이었다.


아르나바즈의 손이 순식간에 셀라의 치마를 뒤집었다.


“에? 꺄아악!”


찌익.


망설임 따윈 없었다.

그녀는 단검으로 셀라의 속치마를 거침없이 찢어발겼다.


전혀 상대를 봐 주지 않는 거친 손길.

필요한 만큼 취하겠다는 무심한 의지가 보였다.


찢기는 고운 천의 파열음.

셀라의 의미 없는 저항.

무너져가는 불길 소리에서도 그 소리만은 모두의 귀에 박혔다.


갑작스러운 봉변에 셀라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도, 심지어 가레스조차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감히 아르젠트의 옷을!"


셀라가 얼굴을 붉히며 바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르나바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찢어낸 최고급 실크 천으로 에드먼드의 허리를 능숙하게 감아올리며 단단히 압박했다.


그녀의 손은 빠르고 정확했다.

피해자인 셀라조차 시선을 뺏길 정도의 섬세한 손길.


이윽고 지혈을 마친 아르나바즈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셀라를 쳐다보았다.

무심하지만 서늘한 눈빛이었다.


“아르젠, 뭐?”

“…….”


순간 셀라의 뇌리에 지하에서 적의 목을 단숨에 베어 버리던 그 압도적인 무력이 스쳤다.


공포와 경외가 뒤섞였다.

셀라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술만 달싹거렸다.



“돈…”


그러나 그녀는 뼛속까지 상인이었다.

공녀로서 자존심, 그리고 절대 손해는 보지 않겠다는 본능이 공포를 가까스로 눌러 이겼다.


“도, 돈 없인 거래도 없어! … 요.”


셀라의 목소리가 쥐구멍으로 기어들어 갈 듯 작아졌다.


“외, 외상으로 달아둘 테니까… 나중에 꼭 청구할 거야! … 요.”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모를 기묘한 말투였다.

고통 속에서도 에드먼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르나바즈 역시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비싼 붕대값이군."


셀라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르나바즈의 신속한 처치로 지혈은 끝났다.

가레스가 에드먼드를 부축해 일으키며 혀를 찼다.


“부하들은 멀쩡한데 대장만 걸레짝이군. 꼴이 말이 아니야.”

“면목 없습니다...”


그때, 등 뒤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벤이었다.

그는 활을 소중한 보물처럼 가슴에 품은 채,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에드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련님… 으흑. 죄, 죄송해요.”

“루벤?”

“저는… 한 발도 쏘지 못했어요. 무서워서… 손이 너무 떨려서…”


손은 아직도 전장의 공포가 가시지 않은 듯 부들부들 떨렸다.

떨리는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전장의 공포는 마음을 잡아먹고 몸까지 지배하고 있었다.


에드먼드는 힘겹게 손을 들어 루벤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괜찮다."

"하지만…"

"억지로 당긴 활시위는 아군을 겨눌 수도 있다. 쏘지 않은 것도 용기다."


에드먼드는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너의 화살은 언젠가 반드시 내 목숨을 구해줄 날이 올 거다. 그때를 위해 아껴둔 거로 생각하마."


루벤의 눈이 커졌다.

질책이나 실망 대신 돌아온 것은 무거울 정도의 믿음이었다.


겉치레나 위로의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의 활이 전장의 빛을 쏘아 올릴 시간이 반드시 올 거라는 예언과도 같은 말이었다.


청년은 눈물을 벅벅 닦아내며 콧물을 삼켰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


아르나바즈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코르반의 병사들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전장의 진정한 지휘관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들은 목격하고 있었다.


“이동하자. 꾸물거릴 시간 없어.”


가레스가 수도원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재촉했다.

화마가 집어삼킨 수도원은 이제 거대한 횃불이 되어 밤하늘을 태우고 있었다.


“불길이 너무 커. 인근의 적이나 다른 세력의 이목을 끌기 딱 좋겠어.”


가레스의 지시에 병사들이 신속하게 장비를 챙겼다.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을 시간은 없었다.

혹시 모를 적의 증원을 피해야 했다.


그들은 타오르는 수도원을 등지고,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 고원 너머의 무너진 감시탑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여명이 고원을 비추기 시작했다.


행군 대열의 중간.

셀라는 찢겨 나간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녀 곁에는 넋이 나간 붉은 머리 소녀가, 그 옆에는 피 묻은 하얀 털옷을 입은 아르나바즈가 무심하게 걸었다.


셀라는 힐끔힐끔 아르나바즈를 훔쳐보았다.

압도적인 무력.

냉철한 상황 판단.

망설임 없는 결단.


공작령의 허례허식에 찬 기사들의 둔중함이 아닌, 야생의 날렵함이었다.

마치 표범과 같은 몸놀림.


꿀꺽.

셀라가 마른침을 삼켰다.


노곤하게 지친 몸과는 달리 머릿속 주판이 빠르게 튕겼다.

저런 인재를 놓치는 건 상인으로서 직무 유기다.

또한 아르젠트의 수치였다.


“저기…”


셀라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지만, 아르나바즈는 대꾸 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그 반응에 욱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지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 호위병… 아니, 아르젠트 가문의 기사가 되지 않을래… 요?”


셀라의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마르셀에서 가장 큰 부를 소유한 공작령의 기사.

잘하면 작위도 받고 영지도 하사받을 수 있었다.


평생의 부와 명예가 보장된 자리였다.

용병이라면 껌뻑 절이라도 하며 받아야 할 제안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르나바즈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후.”

“왜 웃어? 진심인데? 보수는 원하는 만큼 줄 수 있어. 내 권한으로…”

“아직 넌 그릇이 부족해.”


아르나바즈가 딱 잘라 말했다.

마치 더는 논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단절이었다.


셀라의 미간이 좁혀졌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다고?

게다가 그릇이 부족하다니, 천하의 아르젠트에게?


“뭐라고? 어떤 점이야, 그건.”


아르나바즈가 걸음을 멈추고 셀라를 내려다보았다.

새벽빛에 비친 눈동자는 호수처럼 깊고 고요했다.


그야말로 명경지수(明鏡止水).


아르나바즈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그 안에는 묘한 온기가 묻어나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동료를 믿고 칼을 찔러 넣으라고 외치는 배짱.”

“… 하?”


셀라로서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영역의 대답이었다.

아르나바즈의 눈빛에는 도발과 진중함이 동시에 스쳤다.


그녀의 등 뒤로 푸른 새벽이 떠오르자, 마치 전장의 여신 같은 장엄함을 자아냈다.


“너에겐 그게 있나? 나의 등을, 나의 칼을 온전히 믿고 네 목숨을 걸 수 있는 배짱이?”


아르나바즈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다시 걸음을 옮겨 비틀거리는 에드먼드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셀라는 멍하니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까 지하에서의 격전.

피아식별조차 불가능했던 칠흑 같은 혼돈 속에서, 에드먼드는 소리쳤다.

‘그냥 찔러!’라고.

그리고 아르나바즈는 망설임 없이 검을 꽂아 넣었다.


자신을 피해 적만 찌를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

아니면 적과 함께 죽어도 상관없다는, 광기 어린 신뢰.

그 둘 중 하나 없이는 불가능한 도박이었다.


셀라는 찢어진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꾹 쥐었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도무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그들의 비이성적인 유대.

그것은 천하의 '황금 주판'으로도 셈할 수 없는, 명백한 '계산 밖의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