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死線)의 시간

<설계자의 전쟁론> 1부 3장 | 제32화

by 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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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3장. 작은 불꽃들

32화. 사선(死線)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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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Youtube_The Riverside Tavern 취향에 따라 들어주세요 :)


“가레스, 이제 앞으로 얼마나 남았어요?”


루벤의 목소리에는 물기 어린 초조함이 배어 있었다.

가레스는 거친 숨을 내쉬며 지도와 태양의 위치를 번갈아 확인했다.


“젠장. 독도법(讀圖法)은 저 녀석 전공인데. 솔직히 언제 본대를 따라잡을지, 나도 장담 못 하겠다.”


가레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드물게 자신 없는 말을 했다.

루벤은 입술을 깨물고 축 늘어진 에드먼드를 내려다보았다.

쥔 주먹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약속한 시각은 정오였다.

그전까지 본대에 합류하지 못하면 에드먼드의 목이 날아간다.


코르반의 병사들은 사활을 걸고 이동 중이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과다 출혈로 걷기조차 힘든 에드먼드를 위해 급히 소달구지를 동원한 것이 화근이었다.


덜컹.


“으윽…”


나무 바퀴가 돌부리에 걸릴 때마다 에드먼드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충격이 고스란히 옆구리의 상처를 갉아 먹고 있었다.


“이건 이동 수단이 아니라 고문 기계일 뿐이잖아.”


가레스의 탄식에 에드먼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형편없는 검술로 무모하게 돌격했던 대가.

그를 지켜보는 동료들의 속만 타들어 갔다.


“안 되겠습니다. 차라리 업고 갑시다!”


데니스의 한마디에 병사들은 마침내 달구지를 포기했다.

돌아가며 그를 업고 뛰어가기로 결단했다.


첫 주자는 루벤이었다.

그는 나무 부목으로 에드먼드의 몸을 고정하고 비장하게 일어섰다.

그러나 의욕만으로 체급 차이를 메울 수는 없었다.


가느다란 체격의 청년에게,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성인 남자를 업고 산길을 걷는 일은 거의 고행에 가까웠다.


“크윽… 아, 아직 괜찮아요! 더 갈 수… 웁!”


죽기 살기로 버티던 루벤의 다리가 결국 풀렸다.


왈칵.

토사물을 쏟아내며 루벤이 무너졌다.


에드먼드도 덩달아 바닥을 굴렀지만, 쓴웃음조차 짓지 않고 흙투성이가 된 루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결국 루벤은 소달구지에 짐짝처럼 실려 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다음부터는 아귀다툼이었다.

서로 에드먼드를 업겠다고 나서는 병사들의 기묘한 경쟁이 이어졌다.


에드먼드는 난색을 보였지만, 충성심에 불타는 병사들을 말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르나바즈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만류하는 시선을 모조리 무시하고 에드먼드를 깃털처럼 가볍게 둘러업었다.

그러고는 허벅지를 단단히 받쳐 들며 피식 웃었다.


“역시 따뜻하군. 성능 좋은 난로야.”

“……”


에드먼드는 말이 없었다.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다만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망설이는 듯한 몸짓만이 이어졌다.


아르나바즈는 능글거리는 얼굴로 에드먼드에게 속삭였다.


“이대로 라드 요새까지 모실까? 승차감은 보장하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에드먼드의 귀 끝이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결국 보다 못한 가레스가 한숨을 쉬며 교대를 자청했다.


“이봐. 내가 업겠다. 지휘관의 수치심이 여기까지 느껴지는군.”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어질 따뜻함이었는데.”


아르나바즈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자, 에드먼드는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사양하겠습니다…”


아르나바즈의 짓궂은 농담에 병사들 사이에서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부상자와 민간인을 데리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 행군은 예상보다 훨씬 더디고 고통스러웠다.


에드먼드는 억지로 괜찮은 척 농담을 받아주었지만 한계가 뚜렷했다.

웃음기는 금세 사라졌고, 대화가 끊길 때마다 고개가 힘없이 툭, 툭 떨어졌다.


달구지에 앉아 있던 셀라의 시선이 에드먼드의 등, 정확히는 허리에 감긴 붕대로 옮겨 갔다.


4월의 선선한 바람이 찢어진 치맛자락 사이로 숭숭 스며들었다.

다리가 서늘했지만 그보다는 붕대에 배어 나오는 붉은 핏자국이 더 눈에 밟혔다.


‘질려버리겠네, 정말.’


저 사람의 무모함에 혀를 차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고작 남작령의 하급 귀족 따위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

그게 콧대 높은 공녀의 자존심을 묘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셀라는 시선을 돌렸다.


덜컹거리는 소달구지 위.

맞은편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붉은 머리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대체 이 아이는 뭐지?’


아까 적의 우두머리가 했던 말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아르젠트의 공녀인 자신을 미끼로 던져서라도 차지하려 했던 아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조그만 아이의 몸값이, 나보다 높다고?’


셀라는 턱을 괴고 소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불꽃 같은 붉은 머리카락.

하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소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보통의 아이라면 울음을 터뜨리거나 집에 가고 싶다고 매달릴 법도 한데, 소녀는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충격이 큰 건가? 아니면…’


그때, 소녀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달싹거렸다.

셀라는 호기심에 귀를 기울였다.


“……”

“응? 뭐라고?”


셀라가 되물었지만, 소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텅 빈 눈동자로 허공만 응시한 채,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를 기계처럼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


뜻 모를 중얼거림.

가엾게도 아이는 공포에 질려, 목소리마저 잃어버린 아이 같았다.


안쓰러움에 소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가늘게 떨리는 등을 토닥이며, 며칠간 겪었을 공포를 조금이나마 덜어주려 애썼다.


득 될 것 없는 장사였다.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이 가슴 속에서 피어올랐다.


‘이 아이에겐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힘이라도 있는 걸까.’


셀라는 소녀의 등을 토닥이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남은 기묘한 의문을 떨쳐내지 못했다.


누군가와 이 감정을 논하고 싶었다.

자연스레 앞서가는 에드먼드의 등으로 시선이 향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그가 회복하고 나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귀찮게 달라붙을 때쯤 되면, 슬쩍 이야기해 줄 생각은 있었다.

자신을 구해 준 하급 귀족에게 그 정도 선심쯤은 베풀 수 있으니까.


셀라는 괜히 뺨을 긁적였다.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간지럼을 느끼며, 그녀는 덜컹거리는 소달구지 위에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코르반의 병력은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은 벌써 라드요새에 닿아 있었지만 부상자와 민간인이 끼어 있는 행군 속도는 봄나들이 나온 아낙네들의 걸음만큼이나 더디기만 했다.


모두가 지쳐가고 있었다.

오십여 명의 병사들이 돌아가며 고통을 나눠서 졌지만 역부족이었다.


야속한 태양은 어느새 머리 꼭대기, 정오를 향해 가파르게 치솟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드라몬드가 못 박은 시간 안에 도착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가레스가 결단을 내렸다.


“터너, 네가 먼저 본대로 달려가라. 에드먼드의 승전보를 알리고 시간을 벌어.”

“알겠습니다!”

“우리는 정예 선발대를 꾸려 최대한 빨리 뒤따르겠다.”


가레스의 등 뒤, 에드먼드는 이미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 보였다.

가물거리는 눈으로 겨우 매달려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가레스가 터너에게 지시를 내리는 순간, 에드먼드의 입술이 미세하게 달싹였다.


“… 안 돼.”

“응? 뭐라고?”

“안… 돼…”


기력이 다해 헛소리하는 걸까.

가레스는 그 중얼거림을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의 넋두리쯤으로 치부했다.


“터너, 당장 출발해!”


재차 떨어진 호통에 터너가 고개를 끄덕이며 전력으로 내달렸다.

멀어지는 터너의 등을 보며 가레스는 이를 악물고 옆을 돌아보았다.


이제 남은 건 소수 정예를 추리는 일뿐이었다.

가레스가 뒤를 돌아보며 짧게 명령했다.


“아르나바즈와 내가 에드먼드를 업고 뛴다. 선발대다.”

“나도 갈래!”


루벤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소리쳤다.


“도련님을 모시는 건 내 일이에요. 죽어도 따라갈 겁니다.”

“… 좋다. 따라와라.”


가레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데니스에게 본대의 지휘권을 넘겼다.

가레스, 아르나바즈, 루벤. 세 사람은 군장을 모두 본대에 맡기고 물통 하나만 챙길 정도로 몸을 가볍게 했다.


이제부터는 진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그들이 막 땅을 박차려던 순간, 달구지에서 뛰어내린 셀라가 앞을 막아섰다.


“나도 가겠어.”

“짐 덩이는 하나로 족해. 꼬마 공녀님은 힘에 부칠 텐데.”


아르나바즈가 도발하듯 말을 던졌다.

셀라는 코웃음을 쳤다.


“아르젠트의 공녀를 우습게 보지 마. 달리는 걸 두려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리고….”


아르젠트의 공녀는 입술이 바싹 마른 에드먼드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고는, 마음을 다잡듯 단호하게 말했다.


“아르젠트라는 이름이 도움이 될지도 몰라.”

“과연.”


가레스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비장한 눈빛으로 모두를 훑어보았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의 시작이다. 무사히 본영에서 보자.”


단호한 호흡과 함께 네 사람은 질주를 시작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발바닥에 잡힌 물집이 터져도 멈추지 않았다.

매번 자신들을 위기에서 건져 준 남자를 위해서였다.


이름뿐인 ‘마레움의 영웅’이 아니라, 우리들의 ‘코르반의 영웅’을 살리기 위해.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발바닥은 진작에 짓이겨져, 물집이 터지고 피고름이 양말을 적시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셀라 아르젠트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고통을 삼켰다.


아르젠트의 핏줄은 고작 이런 고통에 무릎 꿇지 않는다.



“하아, 하아…”


시야가 핑핑 돌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앞서가는 아르나바즈가 흥미롭다는 듯 힐끔거렸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독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본대 합류 직전 절망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헐레벌떡 되돌아온 터너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본대가… 본대가 행군 속도를 높였습니다! 승전보를 전하자마자 드라몬드가 전군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뭐라고?”


가레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승전보를 전해 본대의 발을 묶으려던 수가, 오히려 드라몬드의 악의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행군 속도를 높이다니.


그에게 중요한 건 라드 요새의 방위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기한을 어기게 만들어 코르반의 목을 장대에 매다는 것뿐이었다.


“젠장…!”


가레스는 등 뒤에 업힌 에드먼드를 힐끗 돌아보았다.

이제는 거의 의식을 잃어, 그저 그의 어깨에 몸을 걸친 채 흔들릴 뿐이었다.


아까 출발하기 전, 그가 힘겹게 중얼거렸던 말.


‘안 돼.’


그건 고열에 들뜬 헛소리가 아니었다.

놈의 비열한 본성을 꿰뚫어 본 본능적인 경고였다.


‘내가 망쳤다.’


가레스의 눈에 후회와 자책이 스쳤다.

그의 공백이 이다지도 서늘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으려던 찰나, 아르나바즈의 목소리가 그들의 정신을 때렸다.


“일단 달려. 후회는 나중에 해.”


그 말이 신호탄이었다.

심장이 터져라, 그들은 다시 땅을 박찼다.


지금 그들이 달리고 있는 곳은 험준한 산길 따위가 아니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베일 듯 위태로운 '사선(死線)' 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