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전쟁론> 1부 3장 | 제33화
추천BGM
터너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발대는 본영의 임시 거점에 도착했다.
하지만 본영의 공기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집결 첫날의 분주함도, 왁자지껄한 소음도 온데간데없었다.
병사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뛰어 들어오는 에드먼드 일행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터너가 가져온 소식은 이미 본대 전체에 퍼진 뒤였다.
고작 한 줌의 징집병으로 요새화된 거점을 두 곳이나 격파했다는 기적 같은 승전보.
병사들은 진심으로 영웅의 귀환을 환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임시 사령부의 막사 앞. 드라몬드가 악의적으로 설치해 둔 거대한 해시계가 서 있었다.
그 야속한 그림자가 막 ‘정오(正午)’의 선을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호 대신 무거운 침묵과 안타까움만이 그들을 맞이했다.
“허억, 헉… 참모장! 코르반이 왔소!”
기력이 다한 가레스가 마지막 힘을 짜내 고함을 질렀다.
드라몬드는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그들의 꼴을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환영의 의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덫에 걸려든 사냥감을 확인하는 사냥꾼의 비릿한 웃음이었다.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해시계의 그림자를 손가락질하며, 살찐 입술을 열었다.
“영웅들의 귀환이군. 그것도 조금 늦은 귀환이.”
가레스와 아르나바즈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드라몬드를 노려보았다.
뒤따라온 루벤과 셀라는 흙바닥에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해댔다.
하지만 드라몬드는 그들의 고통을 즐기기라도 하듯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사령관에 대한 예의가 없군. 코르반은 대체 뭘 하고 있나?”
“뭣이?”
가레스가 발끈했다.
사경을 헤매는 사람에게 예의와 격식을 찾다니.
당장이라도 달려들려는 찰나, 에드먼드가 가레스의 귓가에 힘겹게 속삭였다.
“… 내려주십시오.”
“하지만!”
“부탁입니다.”
희미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가레스는 입술을 깨물며 에드먼드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주었다.
갑옷까지 벗어 던지고 업고 뛴 그의 등은 비 오듯 쏟아진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에드먼드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대지를 밟았다.
비틀.
쓰러질 뻔했으나 이를 악물고 버텼다.
드라몬드는 그 위태로운 모습을 보며 짐짓 엄격한 지휘관의 가면을 썼다.
“귀관이 세운 공은 인정한다. 실로 놀라운 업적이야.”
드라몬드의 목소리가 연병장에 울려 퍼졌다.
“고작 한 줌의 징집병으로 요새화된 적을 격파하고, 아르젠트의 공녀까지 구출했다. 기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군.”
그 말에 병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병사들의 눈에 희망의 빛이 돌기 시작했다.
드라몬드가 이 엄청난 공로를 참작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며 드라몬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허나, 군율은 과정이 아닌 결과로 지켜지는 법. 귀관은 스스로 맹세한 기한을 넘겼다.”
드라몬드의 말이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귀관이 약속한 정오(正午)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다. 본대 전체의 작전이 걸린 엄중한 ‘군령’이다. 만약 영웅이라는 이유로, 승리했다는 핑계로 명령을 어긴 자를 용서한다면 내일은 누가 내 명령을 따르겠는가?”
연병장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너도나도 영웅이 되겠답시고 대열을 이탈할 텐데, 그게 군대인가? 아니면 오합지졸 도적 떼인가!”
병사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 전시 상황의 명령 불복종은 자그마한 승리보다 더욱 엄중하다. 따라서 본관은 군율을 바로 세우고자 한다. 영웅 하나를 죽여 천 명의 군기를 세울 수 있다면, 본관은 눈물을 머금고라도 그리할 것이다.”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너의 공로는 인정하나, 죽어야 한다.’
병사들의 눈동자에 동요와 절망이 번졌다.
에드먼드는 피가 배어 나오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억지로 몸을 지탱했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안색은 창백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에, 드라몬드의 눈에는 잔인한 희열이 비쳤다.
“귀관의 지체는 라드 요새 집결을 늦춘 치명적인 오점이다. 그러니, 귀관이 자청한 대로 군법에 따라 처분을 내리겠다. 집행하라!”
그의 손짓에, 얼굴을 검은 천으로 가린 부월수(斧鉞手)가 거대한 도끼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러나 도끼를 쥔 부월수의 손조차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침묵은 곧 동요로 번졌다.
동요는 거대한 분노가 되어 들끓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목숨 걸고 싸운 영웅을 죽인다고?”
누군가의 작은 항의가 시작이었다.
그 불씨는 마른 장작에 불이 붙듯 삽시간에 본영 전체로 번져 나갔다.
쿵! 쿵! 쿵!
창대의 울림은 엘라임의 이름 모를 징집병에게서 시작되었다.
하나가 시작하자 수백 개의 창이 일제히 대지를 울렸다.
징집병들뿐만 아니었다.
본대의 병사들, 심지어 드라몬드의 호위병 몇몇조차 눈치를 살피다 슬그머니 창끝으로 땅을 두드렸다.
무언의 시위.
영웅을 죽이지 말라는 무겁고도 거친 압박이었다.
“이, 이놈들이! 단체로 반란이라도 일으킬 셈이냐!”
드라몬드는 당황했지만, 곧 악에 받친 고함을 질렀다.
“부월수는 뭐 하나! 빨리 집행해! 이건 군령이다!”
부월수조차 병사들의 창 소리에 담긴 살기에 손이 떨렸다.
그렇다고 상관의 서슬 퍼런 호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결국 도끼가 높이 치켜들어졌다.
시퍼런 날이 하늘로 솟구쳤다.
에드먼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모든 병사가 숨을 죽였다.
부웅.
육중한 도끼날이 바람을 가르며 에드먼드의 목을 향해 떨어졌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
모두가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였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음이 도끼의 파열음을 집어삼켰다.
은빛 섬광이 허공에 가로획을 그었다.
부월수의 거대한 도끼날이 두부처럼 썰려, 바닥에 요란하게 나뒹굴었다.
잘린 도낏자루 너머, 매서운 눈빛의 여성이 서 있었다.
“헛짓거리들 하지 마.”
아르나바즈였다.
그녀의 몸짓이 시작의 신호였다.
가레스가 방패를 치켜올리며 에드먼드의 앞을 막아섰다.
뽑아 든 롱소드가 맹수의 이빨처럼 번뜩였다.
“코르반을 해하려는 자! 나, 가레스 발로르가 상대해 주마!”
가레스의 포효가 주둔지를 뒤흔들었다.
“자신 있는 놈은 나와라! 나와 생사를 가름해 보자!”
부릅뜬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대기를 찢어발길 듯 사나웠다.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만인적(萬人敵)의 형상 그 자체였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 드라몬드의 호위병들조차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이, 이 미친놈들이…!”
드라몬드는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
“항명이다! 저놈들을 당장 포위해! 죽여도 좋다! 어서!”
창끝이 에드먼드 일행을 향해 숲처럼 들이닥쳤다.
포위망 너머, 궁수들의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끼릭.
금방이라도 활시위가 튕겨 나갈 듯한 살벌한 긴장감.
가레스의 눈동자에 흉흉한 살기와 함께 짙은 회한이 스쳤다.
그는 등 뒤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지휘관을 힐끔 곁눈질했다.
‘미안하다.’
아까 터너를 보낼 때, 네가 힘겹게 뱉어낸 ‘안 돼’라는 말이 이 뜻이었구나.
놈의 악의를 읽지 못한 나의 오판이, 결국 너를 이 사지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약속하마.’
가레스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저 화살들이 네 몸에 박히는 일은 없을 거다.’
가레스는 방패를 쥔 손에 으스러지라 힘을 주며, 자신의 거대한 등판으로 에드먼드를 완전히 가렸다.
온몸이 고슴도치가 되더라도 지켜내겠다는 비장한 각오였다.
그리고 마침내, 궁수들의 손가락이 시위를 놓으려던 찰나.
"모두 멈춰!"
서늘하고도 위엄 있는 일갈이 연병장을 갈랐다.
병사들 사이를 가르고, 찢어진 치마를 입은 소녀가 걸어 나왔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꼴은 남루했으나, 그녀가 뿜어내는 기세는 주위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어린 계집애가. 민간인은 빠져라! 군법을 집행 중이다!"
드라몬드가 그녀의 기백을 떨치려는 듯 팔을 휘저었다.
하지만 셀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미동조차 없는 그 태연함이 오히려 드라몬드를 주춤하게 했다.
그녀는 에드먼드의 앞으로 살짝 나아가 드라몬드를 노려보았다.
마치 왕좌에 앉은 여왕처럼 오만하고 위압적이었다.
“참모장. 당신의 계산은 틀렸어. 아주 심각하게.”
“뭐, 뭐라?”
“당신이 이 남자에게 맡긴 임무가 뭐였지? 도적단 토벌, 즉 병참선 확보 아니었나?”
셀라는 또렷한 목소리로, 연병장 끝까지 들리도록 말했다.
“나는 아르젠트 공작가의 공녀, 셀라 아르젠트다. 마르셀에서 아르젠트의 이름을 모른다고는 못 하겠지.”
좌중이 술렁거렸다.
드라몬드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마르셀 왕국의 일곱 가문 중 하나.
왕국의 최주요 거점 라드 요새 보급을 책임지는 거대한 공작가.
그 이름이, 찢어진 치마를 입은 소녀의 입에서 나왔다.
“이 남자는 적에게 유린당한 왕가의 핵심 병참선을 지켜냈어. 거기에 아르젠트의 공녀까지 구출했고.”
드라몬드가 본능적으로 흠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는 이내 독이 오른 뱀처럼 눈을 부라리며 악을 썼다.
“공녀든 뭐든, 군법은 군법이다! 군기는 엄정해야 하는 법! 감히 신성한 군령 집행에 민간인이 끼어들어 왈가왈부하다니, 이건 명백한 언어도단이다!”
드라몬드의 악에 받친 항변.
하지만 셀라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녀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마치 말귀를 못 알아듣는 짐승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군법? 웃기지 마.”
셀라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연병장의 그 어떤 고함보다 또렷하게 꽂혔다.
“전시에 군법보다 더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바로 '보급'이야.”
그녀의 눈빛이 드라몬드를 싸늘하게 훑어내렸다.
“군대를 유지하는 건 잉크 묻은 군령장이 아니라 빵 한 조각이니까. 굶주린 군대에 군법이고 나발이고 무슨 소용이야?”
그녀는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드라몬드를 쏘아보았다.
“그런데 고작 백작령의 참모장 따위가, 왕국의 주요 병참선을 지켜낸 영웅을 죽이겠다고?”
셀라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소녀라고는 믿기지 않는, 서릿발 같은 엄숙함이 서려 있었다.
“착각하지 마. 그건 군령의 집행이 아니야.”
그녀의 입술이 매섭게 열렸다.
“아르젠트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왕가에 대한 반역 행위지.”
선전포고와 반역.
하나만으로도 억만금 같은 단어가 둘이나 동시에 떨어졌다.
드라몬드는 목덜미에 서늘한 칼날이 들이대진 듯한 감각을 받았다.
셀라는 팔짱을 끼고 나직이 말을 이었다.
“선택해. 그를 죽이고 왕국의 역적이 될지, 아니면 아르젠트와 왕가의 감사를 받을지.”
드라몬드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명분도, 실리도, 무력도 완전히 패배한 꼴이었다.
어쩐지 재수가 너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렇게 돌아왔다.
그는 부들부들 떨며 손을 내저었다.
“병참선 확보의 특수성을… 이번만은 참작하겠다.”
셀라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귀를 쫑긋 세우는 시늉을 했다.
얼굴에는 순진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형 집행을 취소한다…!”
작은 웅성거림.
곧 거대한 환호성이 되어 병영을 휩쓸었다.
와아아아!
병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에드먼드의 생환에 대한 기쁨이자, 권위적인 상관을 논리로 찍어 누른 통쾌함이었다.
드라몬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드먼드의 몸이 힘없이 기울었다.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더 이상 서 있을 기력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쓰러지는 그를 양옆에서 받아낸 것은 아르나바즈와 셀라였다.
아르나바즈는 셀라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제법 그릇이 커졌군."
그 말에 셀라가 콧방귀를 뀌며, 에드먼드의 팔을 고쳐 잡았다.
"흥. 내 그릇은 원래부터 컸다고! 요…"
셀라의 토라진 얼굴.
하지만 이내 에드먼드를 바라보는 시선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상인으로서의 계산 밖의 답에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걸고.
아르나바즈의 말은 그저 단순한 농담만이 아니었다.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된 몸이었지만, 에드먼드의 등은 그 누구보다 따뜻했다.
과연 '고급 난로'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셀라는 슬그머니 에드먼드를 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생애 처음으로 황금 주판의 계산이 틀어지는 순간.
하지만 왠지, 그 따뜻한 오차가 싫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