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전쟁론> 1부 3장 | 제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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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를 훌쩍 넘긴 시각.
드라몬드의 막사에는 무거운 침묵만 감돌았다.
쾅!
드라몬드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저릿한 반동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네까짓 놈들이 감히…”
병사들의 눈빛은 살기등등했다.
사실상의 집단 항명.
그러나 드라몬드는 그들을 처벌할 수 없었다.
‘황금 주판’ 셀라 아르젠트가 시퍼런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몬드는 에드먼드가 기절 직전에 넘긴 보고서를 으스러지라 쥐고 있었다.
구겨진 종이 옆에는 아르젠트 공작가의 감사 서신과 왕실 훈장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먼지투성이 꼬마가 진짜 공녀였을 줄이야.
형 집행을 취소하면 가문의 감사와 포상을 내리겠다는 약속은 지켜졌다.
차라리 거짓말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완벽한 보상이 오히려 드라몬드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크흑…”
보고서에 적힌 전공은 명백했다.
화려한 미사여구 따위는 없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냉철한 상황 재구성만 있었다.
불타 버린 마을의 참상.
채석장 전투.
수도원 공략과 공녀 구출.
가레스의 등에 업혀 가면서도, 에드먼드는 이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기록해 둔 것이다.
고작 오십의 징집병으로 이뤄낸 성과라니.
누군가 입으로만 전했다면 술주정뱅이의 허풍이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보고서는 공적인 효력을 가진다.
드라몬드가 손을 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쨍그랑!
드라몬드가 집어 던진 와인잔이 산산조각 났다.
어둠 속에 붉은 파편이 튀었다.
그 소리에 맞춰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걸어 나왔다.
“각하. 왜 이리 노여워하십니까.”
“데미안! 내가 지금 화를 참게 생겼나. 천한 것들에게 망신을 당했는데!”
드라몬드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소리쳤다.
그러나 데미안은 싱긋 웃기만 했다.
“망신이라니요. 관대함과 합리성을 보여주신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소름돋을 만큼 부드러웠다.
“아르젠트 공녀가 빚을 졌다고 공언했습니다. 왕실의 훈장도 손에 넣으셨지요. 실리를 챙긴 승자는 각하입니다.”
사근사근한 말끝에 독이 얇게 발려 있었다.
자존심을 조금 내어주고 이익을 건졌다는 위안에 거친 숨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긴…”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드 요새는 코앞입니다.”
데미안은 회갈색 머리칼을 단정히 넘겼다.
눈빛은 웃지 않았다.
“전장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넘쳐나지요. 그 변수는 막을 수 없습니다. 다만 이용할 수는 있습니다.”
드라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자네 말이 옳아.”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새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테이블을 쾅쾅 쳤다.
“그 빌어먹을 자식. 요새에 가면 백작도 계시니, 기필코 요절을 내주겠다.”
떠드는 드라몬드를 바라보는 데미안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멍청한 놈.’
드라몬드는 에드먼드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에드먼드 코르반.
마레움의 젊은 영웅.
데미안은 입술을 한 번 훑었다.
흥미가 번뜩였다.
허공 어딘가를, 마치 시험대라도 재는 듯 바라보며 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에드먼드의 응급 처치가 끝날 즈음, 코르반의 본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도착했다.
“도련님!”
뒤늦게 합류한 터너와 데니스가 달려왔다.
눈가가 벌써 젖어 있었다.
가레스는 붕대를 감은 팔을 들어 보이며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질기디질긴 목숨들이니.”
그제야 안도의 숨이 터졌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울었다.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셀라는 그 소란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달구지 구석에 웅크린 붉은 머리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아직도 주변을 눈으로만 더듬고 있었다.
“얘! 이리 오렴.”
셀라가 손을 내밀었다.
소녀는 멍하니 셀라를 올려다보더니,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대로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
셀라는 잠깐 멈칫했다.
이내 떨리는 등을 조심스럽게 감싸안았다.
작은 몸이 바르르 떨렸다.
셀라 역시 아직 어린 소녀였다.
무섭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같았다.
그런데도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 아이는 지금, 붙잡을 곳이 필요했다.
“괜찮아. 이제 안전해.”
셀라는 소녀를 주둔지의 막사로 옮겨 앉혔다.
물을 먹이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 뒤 곧바로 아르젠트의 연줄을 찾았다.
보급관 하나가 셀라를 알아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곧장 인편을 마련했다.
셀라는 전갈을 띄웠다.
무사하다는 것.
예정대로 라드 요새로 향한다는 것.
모든 처리를 끝내고 천막 밖으로 나오자,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후우…”
져가는 태양을 바라보는 순간, 발끝에서 욱신거림이 기어올랐다.
긴장이 풀리자, 물집 잡힌 발이 이제야 투정을 부리는 듯했다.
아팠다.
그런데 나쁘지 않았다.
살아남았다는 증거였으니까.
해가 질 녘이 되자 에드먼드의 열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가레스는 “잡초 같은 생명력”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검술의 기교는 부족할지언정 타고난 강골과 정신력만큼은 단련된 기사 못지않았다.
“후우…”
에드먼드는 침침한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막사 안에는 적막만 감돌았다.
옆구리가 불에 덴 듯 욱신거렸지만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채석장과 수도원에서 노획한 전리품을 꺼내 들었다.
수도원 우두머리의 품에서 나온 물건들이었다.
피 묻은 장부.
알 수 없는 암호로 적힌 인수인계서.
그리고 묵직한 가죽 주머니.
촤르륵.
주머니 끈을 풀자 묵직한 금속음과 함께 황금빛이 쏟아져 나왔다.
제국의 황제 바실리우스의 옆얼굴이 새겨진 금화, ‘솔린(Sollin)’이었다.
‘또 제국 금화인가.’
에드먼드의 미간이 깊게 좁혀졌다.
채석장의 산적들.
수도원을 점거한 광신도들의 우두머리까지.
그들의 주머니는 약속이나 한 듯 제국 금화가 튀어나왔다.
솔린은 대륙의 기축통화다.
마르셀 왕국에서도 통용된다.
하지만 일개 도적 떼나 용병단이 제국 금화를, 그것도 뭉칫돈으로 쥐고 있다는 건 상식 밖이었다.
‘단순한 약탈품이 아니야. 자금줄이 있어.’
에드먼드는 차가운 금화 한 닢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역시 이 일은 제국과 얽혀 있는 것일까.
그때였다.
“응? 벌써 일어났어?”
막사 입구가 들춰지며 셀라 아르젠트가 들어왔다.
그녀의 뒤에는 말끔히 씻은 붉은 머리 소녀가 찰싹 달라붙어 따라왔다.
그녀는 침상 옆 의자에 털썩 앉아 턱을 괴었다.
붉은 머리 소녀도 그녀를 흉내 내듯 에드먼드의 침상 옆에 쪼르르 자리를 잡았다.
“몸은 좀 어때? 죽다 살아난 사람치고는 안색이 나쁘지 않네.”
“덕분입니다. 공녀님께서 드라몬드를 멋지게 밟아주셔서.”
에드먼드가 대꾸하자 셀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시선은 붕대 감긴 에드먼드의 옆구리에 말없이 머물러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메우려는 듯, 셀라는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그나저나 코르반이라고 했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공녀께서 기억하실 만한 곳은 아닙니다. 변방의 작은 시골 영지니까요.”
“뭔가 있었는데…”
셀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민한 머릿속 서랍이 바쁘게 열리고 닫혔다.
이내 무언가를 찾아낸 듯 손바닥을 탁 쳤다.
“아! 붉은 깃털의 기사! 아델라인 코르반!”
“맞습니다. 제 누님입니다.”
똑 부러지는 공녀라 해도 영웅담에 설렐 나이였다.
셀라가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이어가려던 찰나였다.
그녀의 시선이 급히 꺾였다.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쏟아져 있는 황금빛 무더기.
반짝.
그것을 본 순간, 아르젠트의 핏줄이 반응했다.
셀라의 눈동자가 금화만큼이나 황홀하게 빛났다.
“오, 이건…”
셀라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녀는 홀린 듯 손을 뻗어 탁자 위 금화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박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표면을 훑는 순간, 장난기 어린 표정은 사라졌다.
“잠깐.”
셀라는 거침없이 에드먼드의 양손을 잡아끌었다.
“손 펴봐.”
“예?”
그가 얼떨결에 손바닥을 펼치자, 셀라는 좌우에 각각 금화 하나씩을 올려놓았다.
“느껴져?”
“뭐가 말입니까?”
“무게.”
셀라의 눈매가 서늘하게 좁혀졌다.
“왼손의 금화가 더 가벼워. 미세하게.”
“그런가요? 둘 다 제국 주조소의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만.”
에드먼드가 들여다보았으나 맨눈으로는 차이를 찾을 수 없었다.
셀라는 콧방귀를 뀌더니 주머니 속 금화를 스무 개쯤 와르르 쏟아부었다.
그때부터 기예에 가까운 분류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오른손에 기준이 될 ‘진품’을 쥐고, 왼손으로 나머지 금화들을 하나씩 집어 무게를 달기 시작했다.
챙, 챙, 챙.
금화가 부딪치는 맑은소리가 막사 안에 울렸다.
망설임 없는 손놀림은 섬세했고 단호했다.
잠시 후 금화는 세 무더기로 나뉘었다.
셀라는 개수가 가장 적은, 단 세 개의 금화만을 에드먼드 앞으로 툭 밀어주었다.
“이것만 진짜야.”
“진짜라니요?”
“제국 솔린의 표준 중량을 지킨 정품. 나머지는 전부 불량, 아니 위조품.”
셀라는 나머지 두 무더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쪽은 아주 조금 가볍고, 저쪽은 반대로 미세하게 무거워. 성분은 봐야 알겠지만… 납이나 구리 합금일 거야. 불순물을 섞은 거겠지.”
에드먼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걸 도구도 없이 어떻게 구별합니까?”
셀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별거 아냐.”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코끝을 문질렀지만, 입가에는 뿌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잘 때도 손에서 놓지 않는 게 제국 금화거든. 내 손은 저울보다 정확해.”
“…….”
“아무튼, 상황이 심상치 않아.”
셀라가 금화 더미를 한 번 내려다봤다.
“제국 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자기네 화폐에 장난질을 칠 리가 없잖아. 누군가 사설 주조소를 돌리고 있다는 뜻이야.”
가짜 금화. 그리고 정체불명의 집단.
사건의 냄새가 짙어지고 있었다.
에드먼드의 뇌리에 작년 대륙을 뒤흔들었던 ‘라비타 금화 순도 저하 사건’이 스쳐 지나갔다.
에드먼드는 셀라가 골라낸 가벼운 위조 금화를 손안에서 굴렸다.
진짜보다 미세하게 가벼운 황금.
하지만 그 가벼운 동전 뒤에 숨겨진 음모의 무게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묵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