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자마자 남편이 출근하면서 돌려놓고 간 건조기 소리가 귓가에 은근히 머문다.
결혼하고 처음 써본 건조기.
결혼 전 부모님과 살 때는
통돌이 세탁기의 탈수 기능만 사용해 봤었는데
주변에서는 다들 건조기와 식기세척기는 꼭 사라며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했다.
역시 가족이 최고라고 했던가.
내가 결혼하고 신혼집에 들어갈 때쯤
큰언니는 식기세척기를,
둘째 언니는 세탁기·건조기 타워를 선물해 주었다.
나는 그걸 “사줬다”기보다 “지어줬다”고 표현하고 싶다.
그 이유는 어릴 때 브루마블 게임을 많이 했는데
네모난 무채색의 반듯한 직사각형 타워들이
마치 언니들이 동생 시집가서 잘 살라고
집 앞에 세워 준 “랜드마크 건설~!”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건물은
생각보다 굉장히 조용하다.
예전에는 가전제품이라 하면
길게 늘어지는 청소기 소리처럼
시끄러운 것만 떠올렸는데
막상 써 보니 “이렇게 조용할 수 있다고?” 싶을 정도였다.
식기세척기는 아직 초벌 물설거지(대충 헹구기)를 해야 하지만
그래도 직접 설거지하는 것보다는 훨씬 덜 힘들다.
단점이 있다면 가끔 눌어붙은 밥알이나 고춧가루 정도.
식세기에 넣기 전에 물을 살짝 헹구면서
‘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서 식세기가 이렇게 말한다.
“야… 조선시대를 생각해 봐 ^^
그거라도 하는 게 얼마나 편한 줄 아니?”
내 머릿속에서 괜히 꼰대 같은 성격을 가진
식세기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렇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물건에
성격을 붙이고 “이 친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상상하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다.
그럼 우리 집 건조기는 어떨까?
우리 집 건조기 친구는 나보다 키가 훨씬 크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야 겨우 건조된 빨래를 꺼낼 수 있고
안쪽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가끔 빨래를 개다가 “어? 이 양말 어디 갔지?”
싶을 때가 있는데 대부분의 범인은 건조기다.
억울한 건조기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애처로운 눈빛, 어딘가 원망하는 눈빛을 보내는 것만 같다.
하지만 또 들키기 싫어서 이렇게 까만 썬글라스를 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괜히 혼자 키득키득 웃게 된다.
오늘은 억울한 건조기를 위해
키높이 의자를 밟고 올라가 숨은 양말을 다시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