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뮤지컬 추천작
2021년 12월 31일을 국립극장 기획공연 <명색이 아프레걸>과 함께 보냈다. 어쩌다보니 말일에 보게된 공연이었는데 연말을 마무리하고 새해를 기다리는 시점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공연이었다. 벌써 작년이 되어버린, 21년에 계획했던 일들 중 손도 대지 못한 것들을 곱씹고 있던 찰나여서 더욱이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명색이 아프레걸>은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이 뭉쳐 73명의 출연진들이 만들어낸 블록버스터 공연이다. 김광보 연출, 고연옥 작가, 나실인 작곡가, 이경은 안무가의 합작이기도 하다. 나실인 작곡가는 전통음악도 편안하고 중독성이 있으면서 귀에 탁탁 꽂혀서 잊히지 않는, 한만디로 멜로디를 세련되게 잘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이경은 안무가는 일전에 국립현대무용단 <힙합> 공연의 피날레를 아주 인상적인 작품으로 채웠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공연이 끝나고 궁금한 점이 많이 생겨서 프로그램북을 사서야 이 분들의 합작으로 탄생한 공연이었음을 알게됐다. 이번 공연 역시 오슷이 나와주었으면 할 정도로 넘버가 좋았고. 전반적인 안무와 공연 중간 중간 섞인 독무의 동작들 역시 스토리라인에 맞게 잘 표현되었다. 이 모든 것들을 잘 아우른 연출과 극작, 손색없는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더 멋진 포인트가 있었으니, 관객들에게 전하는 메세지다.
<명색이 아프레걸>은 기대에 반하는 결말로 사람들의 무거운 꿈을 위로하는 공연이다.
최초의 여성 영화 감독인 박남옥의 인생과, 그의 작품 <미망인>을 조망하는 이번 공연의 시대적 배경은 한국전쟁 직후다. 전쟁 직후 남편과 아이를 잃은 미망인들이 많았던 시절, 그들에게 가해진 비난과 차별. 일제강점기 시대의 속박과 여성의 직업과 공부에 대한 차별. 그 모든 것들이 혼합된 혼란의 시대에 박남옥은 아이를 업고 '미망인'에 대한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미망인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미망인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나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살아나가려 하는 모든 노력에 비난이 가해져서는 안된다.'는 말을 외치며.
관객들은 그 시대에 저런 뜻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박남옥의 꿈을 응원하게 되고, 영화 예산을 마련하기가 빠듯해 자신의 손으로 출연진들의 밥까지 지어먹이고 돈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아이를 업고 전국을 뛰어다니는 저 감독의 입봉작이 부디 성공하는 해피엔딩을 맞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공연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완성되어가는 박남옥의 첫 영화 <미망인>. 영화 <미망인>은 제목만으로는 유추할 수 없는 스릴러적인 결말로 치닫는데... 웬걸 그 결말이 센세이션하고 참신하다. 아마도 나를 비롯한 몇몇의 관객은 잠시 시대적 배경을 잊고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저 영화, 흥행하겠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스토리는 실화다. 미망인의 가냘픈 모습과, 정절 내지 희생을 기대하는 사회적 기대와 분위기에 반하는 결말의 영화가 성공할리 없다. 박남옥의 부푼 꿈과 기대와는 달리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고, 공연의 결말 역시 박남옥의 희망찬 모습이나 이후의 영화판 인생을 보여주지 않고 그저 씁쓸하게 끝나버린다. 그런데도 이 공연이 주는 위로의 메세지가 참 강력하다. 비록 그 시대에는 흥행에 참패하였을지 모르나 박남옥은 이 영화로 우리나라에 길이 남는 여성 영화 감독이 되었고. 거의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렇게 공연으로 그의 생애를 접하는 관객들이 있으니 이보다 더한 위로가 있을까. 이번 공연은 안된다는 말이 차고 넘치는 순간에도 꿈 꾸고 있을 무수한 무거운 꿈에게 보내는 위로의 선물같은 작품이었다.
재연을 놓치지 않은 것이 아주 다행스러운 공연. 이 작품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어 많은 위로를 받았고, 또 한번 시작할 힘을 얻었다는 말을 전한다. 또 이런 작품들이 있어서 도무지 공연을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는 말도 함께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