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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디터 Dec 09. 2020

주목받지 못하는 인생을 노래하는 연극 <콘트라바쓰>

누구나 닿지 않는 꿈, 사랑, 그런 거 있지 않나요?

올해 겨울 예당 연극들의 테마가 있다면 '배우는 극한직업' 이 아닐까. 박상원 배우는 연극 <콘트라바쓰>에서 두 시간 내내 대사를 읊조리는 것도 모자라 큰 소리로 외치고, 온몸으로 표현하며 혼자 극장을 채웠고, 아직 리뷰하지 못했지만 연극 <신의 아그네스>의 세 배우 역시 원테이크로 두 시간 넘게 극을 소화한다. 볼 때마다 감탄스럽고 '다시 태어나도 배우는 못하겠다' 싶은 연극들이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콘트라베이스>를 원작으로 하는 이 공연은 특별할 것 없는 단출한 무대와, 주인공(?) 콘트라베이스와, 박상원 배우 그리고 관객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 근데 왜 콘트라베이스를 왜 콘트라바쓰라고 하는 거지? 


1.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독일 출생이다.

2. 콘트라바쓰는 콘트라베이스의 독일 발음이란다.

3. 박상원 배우가 독일 발음대로 '콘트라바쓰'로 표현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탁월한 선택이었다.(박상원 배우가 '콘트라바쓰는 말입니다' '이 콘트라바쓰 없이는 말이에요'라는 말을 극 중에서 자주 사용하는데, 그럴 때마다 묘한 애정과 열정이 뚝뚝 묻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상원의 모노드라마 <콘트라바쓰>는 세 가지를 조명하는 연극이었다.

1. 악기 콘트라바쓰에 얽힌 삶, 역사, 연주자

2.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인생

3. 닿지 않는 사랑, 꿈을 마음에 지닌 삶


1.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는데 유독 역사에는 약한 내가(역사를 여러 번 읽어도 다 그뿐 전부 까먹는다) 콘트라바쓰의 역사에 대해서는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현의 수가 얼마나 많이 변화해왔는지. 3현의 콘트라바쓰가 괴테와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 그리고 살아남은 것이 꼭 압도적으로 위대해서는 아니라는 것도 기억날 것 같다. 악기보다도 활이 비싼 경우가 있다는 것도, 철저한 계층구조의 오케스트라 안에서 콘트라바쓰가 올라갈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도. 공연을 본 지 2주가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2.

머리부터 발끝까지 콘트라바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을 담아내고 있는 연극이다.(두각을 나타낸다는 표현 자체가 조금 주관적일 수는 있겠으나, 그런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잊히기 쉽고, 저 끝에서 보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나 사실은 몹시 중요하다며 콘트라바쓰의 역할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쏟아내는 연주자. 그의 과도한 칭찬과 열정과 애정으로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그의 나약함의 일부임이 극이 진행됨에 따라 드러난다. 극을 보며 물음표가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콘트라바쓰를 사랑하는 걸까 미워하는 걸까.' 이건 스스로의 인생을 사랑하느냐 미워하느냐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대답하기가 어렵다. 삶을 사랑할 때도 있고 미워할 때도 있으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게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일 테다.


3.

이 평범한 콘트라바쓰 연주자는 아름다운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소프라노 '사라'를 사랑하고 있다. 정작 사라는 그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지만 그의 마음은 열렬히 그녀를 사랑한다. 얼마나 사랑하면 자신을 한번 봐주지 않는데도, 그녀의 이름,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그의 사랑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나에게 사라는 능력치와 일치하지 않는 이상이고, 가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버렸던 길이다. 그리고 또 나에게는 어떤 사라'들'이 있었을까.


저런 생각을 하면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 많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 시를 배우면 항상 함축적인 의미에 대해 배우곤 했다. '그'를 기다린다. 는 한 문장이 있다고 치자. 저 모호한 단어 안에는 연모하는 이, 가지 못해 애틋한 조국의 땅, 비록 잠시 내쳐졌지만 언제나 기릴 임금 등 수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가르침을 받아왔다. 해석하는 사람들이 멋대로 그렇게 붙인 거 아냐?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한 가지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연미복을 입고서 자기가 할 선택은 내일 신문 1면에서 확인하라던 그는, 그래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연모하는 사라 앞에서 넘어져볼까, 연주를 엉망으로 해서 날 쳐다보게 할까 고민하다가 아주 아름다운 연주를 했던 날처럼. 그리고 아무도 그 연주가 아름다운지 몰랐던 날처럼 소시민의 삶으로 흘러가버릴까. 아니면 길이 남을 어떤 선택을 할까. 괴테가 언급된 탓인지, 어딘가 모르게 베르테르의 선택이 떠오르는 그의 결정이 궁금하다. 신문 1면에 실릴 선택을 했다면, 그가 부디 다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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