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교 가는 길 : 서프라이즈

'23 10. 14.(토)

by 밍작가

공주가 보고 싶어 질 때가 된 주말이다.


원래 2주에 한 번씩 보러 가지만, 지난주에 강원도로 갔던 출장이 일찍 끝나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얼굴을 보고 내려왔었다. 그리고 이번주는 원래 보러 가기로 한 둘째 주 주말이다. 애비 얼굴을 까먹기에는 조금 시간이 이르다.


전처에게는 일요일에 공주를 보러 가겠다고 했었다. 나 혼자 가는 것보다는 우리 공주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가는 게 나한테도, 공주에게도 좋기 때문이고. 이번주에 부모님이 시간이 되는 날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토요일 오후에는 기술사 모임이 있었기에, 여러모로 일요일에 공주를 보러 가야 했다.


그런데, 토요일도 보고 싶어졌다.


전라도에서 서울에 있는 공주한테 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300km 정도를 운전해서 가는 방법, 기차를 타고 가는 방법.

원래는 차를 많이 타고 다녔지만, 이제는 늙어가는지 몸이 힘들어서 최근에는 기차를 이용한다.


갑자기 공주를 보러 가고 싶은 극 P형의 애비는 새벽 6시 37분에 출발하는 SRT열차로 변경한다. 다른 시간의 주말 기차표는 매진인 경우가 많지만 새벽기차는 여유롭다.


기차를 타기 위해 5시에 일어나서 핑크퐁 펀치백을 가방에 챙기고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역에 가는 길에 전 사람에게 카톡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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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에 일어나서 확인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메시지를 보내놓고 출발한다.

뭐 오지 말라고 하면 카페에 가서 책을 보고 블로그를 써도 된다.


나름 예의 있게 물어보며 의견을 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는 겉보기에만 형식적인 절차다. 답은 정해져 있다.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오지 말라고 할 리 없다는 걸 안다. 내가 가면 본인이 조금이나마 편하기에, 올 수 있으면 더 오라고 하지 오지 말라고 할 리 없다. 공주가 아빠와 자주 보는 것도 원하지만 본인 몸 편한 게 더 중요할 것이다.


7시 넘어서 “그래”라고 두 글자의 답장이 왔다. 무덤덤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이 시간에 카톡이 오는 걸 보니, 오늘도 공주님은 일찍 일어나셨나 보다.


전 날 12시 반에 침대에 누워서 조금 피곤했지만, 면교가는 날은 ‘핏줄’이 반응하는 날이라 피곤한 것도 잘 모른다. 물론 금요일에 수원에 있는 부모님 댁에 가서 자고 토요일 아침에 여유롭게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부모님 댁에 가는 것은 줄일 수 있으면 최대한 줄이려고 한다. 싸운 것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혼 후에도 화목하지만, 무언가 애매하다. 다시 돌아온 아들과 부모님의 한 집에서의 관계란..


수서역에 8시 36분에 도착했다. 분명 출발할 때는 비가 안 왔는데 수서역에 내리니 비가 꽤나 내린다. 우산은 사지 않는다. 10시가 지나면 그친다는 예보를 확인했다.


공주님은 핑크퐁 아기상어를 너무나도 좋아한다. 아기상어 그림이 들어간 아이템만 사가면 자지러질듯한 웃음과 격렬한 반응으로 아빠를 맞이한다. 그래서 매번 면교때마다 무얼 사가게 된다. 언제까지 사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빈손으로 간다고 해서 가끔 오는 아빠가 왔을 때 쳐다도 안보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선물과 함께하면 ‘입장’ 순간이 너무나도 다이나믹하기에 소소한 무언가라도 가지고 간다. 이 맛에 생각보다 무거운 아기상어 펀치백도 마음만은 가볍게 들고 간다.


지하철을 타고 살던 집으로 간다. 예상시간보다 빨리 도착했다. 다행히 비가 그쳐서 전철역에서 집까지는 걸어갈만하다. 이제는 현관 비밀번호를 알지 못하는 옛 집에 서서 노크를 한다. 조금 있다가 전 사람이 공주와 나온다.


“아빠 왔다~!”

“아빠아빠빠빠빠아빠빠~”

“오~~~ 아빠 왔어~~ 우리 공주 잘 있었어?”

(내 가방에 들어있는 아기상어 박스를 보며 ”우오아아우오아아아~~“

“으이구 우리 공주 언제 아빠 가방은 또 봤어~ 이거 우리 공주 꺼야~”


펀치백을 뜯어서 동봉되어 있는 에어펌프로 바람을 넣는다. 아기상어 펀치백에 바람이 차면서 점점 일어설수록 공주의 리액션은 커졌다. "오오오오오", "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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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우와우와우와~”

“짜잔! 아기상어다~“

“우와아아아아아~~”

기대했던 반응이다. 좋다. 보람차다. 아기상어 펀치백을 껴안고 혼자 웃고, 때리고, 재미있게 노는 공주를 보니 참 뿌듯하다.


공주도 올 예정이 없던 아빠가 와서 기쁘고, 아빠도 오지 않았으면 못 느꼈을 행복을 느껴서 좋다.


이렇게 아기상어와 함께한 다이나믹한 서프라이즈 입장이 끝이 났다. 비가 와서 어디 나가지는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책을 읽어주고, 안아주며 신나게 놀아준다. 그리고 열심히 놀던 공주가 밥을 먹고 졸려할 때쯤, 인사를 하고 나온다.

"아빠 갈게~ 내일 할미, 할비랑 올게~"

가는 아빠에게 공주가 손을 흔들어 준다. 쿨하다.


현관문을 닫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덤덤히 내려온다.

그래도 이제는 엘리베이터에서 울지 않는 걸 보니 조금씩 단단해져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공주를 보고 갈 때마다 이 엘리베이터에서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누군가 같이 타면 나는 고개를 돌리며 벽을 보면서 내려왔었는데..

이젠 그래도 다행이다. 울지 않아서.


Surprise는 군대에서 '기습'이라는 표현으로 쓰인다.

기습은 공격의 한 가지 방법으로 상대방의 허를 찌를 수 있는 효과가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기습을 위해서는 은밀해야 하며, 일반적인 공격보다 더욱 치밀한 준비가 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


'서프라이즈'이벤트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에게 예상치 못한 기쁨을 줄 수 있기에 효과는 배가 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깜짝 이벤트를 할 때 우리는 서프라이즈를 많이 한다.


평소에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은밀하게 준비하는 이 노력은 정말 사랑을 하지 않고서야 나오기 힘들다. 더 많이 준비해서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이타심'이 깔려있는 것이니까.


전 사람은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싫어했었다. 예측불가능한 모든 것을 싫어했으니.

하지만 우리 공주님은 서프라이즈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아마 날 닮았으면 좋아하겠지.

그리고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는 애비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아니다. 몰라도 된다. 그냥 행복하면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끔은 예상치 못한 기쁨을 주는 마음 따듯한 사람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준비과정은 조금 더 수고롭겠지만, 허를 찔린 기쁨이 더 큰 웃음과 행복한 표정으로 녹아나는 것을 보면 내가 한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니까.


그리고 나 또한 예상치 못한 더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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