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 만난 사람

by 몽아무르

나 : 그보다 세 살 많은 여자. 영화를 공부하는 유학생. 소심한데 프랑스 와서 더 소심해짐. 정적임. 자주 피곤해 함.

그 : 나보다 세 살 적은 남자. 직장인. 마냥 긍정적. 도시보다 시골을 사랑하고 집에 가만히 못 있음. 에너지가 넘침.




나는 일기를 자주 쓰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이 내 일기에 등장한 건,

그와 첫 데이트를 하고도, 심지어 사귀기로 하고도, 한 달이 지나서였다.


그만큼 나는 내 절망과 외로운 생활에 찌들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

논문에 대한 부담감.

프랑스어와 프랑스인들에 대한 부담감.

내 일기는 그와의 데이트가 아닌, 힘들다, 어렵다로 가득했다.


마음이 굉장히 작은 나는 뭐 하나 물어보는 것도 새가슴이 되어 물어보지 못하는

유리 영혼의 소유자이다.

내 프랑스어가 틀리면 어쩌나 마음 졸이다 결국 하고 싶은 말 삼키고 마는

그런 사람이라 유학생활이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우리는 서점 앞에서 만났다.

나는 늦을 까봐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갔건만 이 사람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

한 십 분을 기다리니 나타난 이 사람은 정말 멋없는 점퍼를 걸치고 구부정한 자세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뭔가 어색한 제스처, 여자를 많이 만나보지 않은 듯한 느낌.

차를 마시기로 했지만 시내 지리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여기에 거의 평생을 살았으면서 시내 지리를 잘 모른다는 건 시내에 자주 안 나온다는 말.

나는 거기서 잠시 실망했다.

집돌이가 아닐까. (라고 말하는 나도 집순이긴 하지만)


걷다가 우연히 들어간 커피숍은

중년 혹은 노년의 어르신들이 많은 촌스러운 카페였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주문을 받아갔다.

나는 커피를,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그는 핫 초콜릿을 시켰다.

커피를 마시면 심장이 쿵쿵 거리고 잠을 못 잔다는 그의 말에

한번 더 실망했다.

왠지 어린애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이제껏 만나온 사람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나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좋아했더랬다.

함께 그림, 영화, 음악,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는 사람.

늘 그런 사람들과 만나왔다.


그는 예술에는 관심도 없고, 좋아하는 영화도 '디즈니 애니메이션'.

한눈에 봐도 숙맥에 재미없는 사람 같았다.


크리스마스가 막 지난 때였고 추웠다.

나는 감기에 걸려서 처음 만난 그 앞에서 연신 코를 풀어댔다.


"미안해요. 감기에 걸려서... (훌쩍훌쩍 팽팽)"


그런 나에게 감기에 좋은 거라며 꿀 넣은 따뜻한 우유를 시켜주는 그.

음. 자상하네.


우유를 다 마시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계산은 어떻게 해야 하지.

온갖 고민을 하고 있는데 다행히도 그가 먼저 영화를 보자고 말했다.

핸드폰으로 상영 영화를 확인하고 예매까지 마친 그.


우리는 영화관으로 걸어갔다.

겨울이라 추웠고 그의 발걸음은 정. 말. 빨랐다.

초면에, 좀 천천히 걸어주겠어요?라고 말하기 쑥스러워 뱁새가 황새 쫓듯 또각 구두를 신고 미친 듯이 걸었다.


내 프랑스어 수준을 고려해 어린이들이 많이 보는 "Belle et Sebastien"이란 영화를 보았다.

멍멍이와 어린 소년의 우정을 전쟁시대를 배경으로 보여주는 영화였다.

그는 보는 종종 내게 시대 배경을 설명해주고

내가 잘 이해하고 있는지 괜찮은 건지 흘끔흘끔 나를 보았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배고프냐고 묻는 그.

조금.이라고 대답하니, 밥 먹을까?라고 묻는다.

나는 알겠다고 했지만 오만 생각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사실 그날 나는 현금이 한 푼도 없었다.

그 당시 내 은행 체크카드는 출금 및 결제가 불가능했다.

내 통장에 돈이 있더라도 한 달에 일정 금액 이상을 쓰면 모든 것이 차단되는 옵션을 골랐기 때문이었다.

마침 크리스마스 때 동생들이 한국서 방문했고

나는 많은 돈을 썼다. 통장에는 돈이 있었지만 출금도 결제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오기 전 한국 카드로 찾은 10유로가 다 였다.

나는 차만 마시고 헤어질 생각이었는데 어물정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일단 식당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창밖으로 현금 인출기가 보였다.

한국 카드로라도 돈을 찾아와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그가 화장실에 가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결국 식사 내내 그는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가 계산을 하게 했다.

마음이 찜찜했다.

다음에 만나면 내가 사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애프터를 할지 안 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말재주가 뛰어나지 않은 그였고, 다른 프랑스 남자들과는 달리 끈적끈적하지 않아서,

내게 호감이 있는 건지 아닌 건지 별로 확신이 없었다.


그는 나를 집까지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집 앞에서도 한 번의 치근거림 없이 나를 보내주었다.

담백하게 잘 들어가고 잘 자라고 인사했다.


그의 집은 멀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오늘 즐거웠다는 문자를 보내오는 그.

착한 사람이고 지분거리지 않아 좋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랑 놀 생각은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이랄까.

아무것도 마음에 드는 것 없이 착한 성품과 끈적이지 않음만 괜찮았던 그였기에

한 달이 지나도록 내 일기에는 그가 등장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내 마음이 그만큼 삭막했던 걸까.

왠지 후자가 맞는 것 같다.


지금은 한없이 긍정적이고 어린애 같기도 한 그 덕분에,

사랑 주고 표현해주기 좋아하는 그 덕분에,

마음의 사막이 많이 사라져감을 느낀다.

푸석하던 내 마음이 많이 촉촉해졌다.

이젠 울지도, 불평하지도 (뭐, 그래 아주 가끔), 나를 저주하지도 않는다.

그런 그를 만났다는 것이 감사하다.

이렇게 나의 터닝포인트는 그와 함께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