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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아무르 Apr 02. 2023

존중이 사라진 배려에는 계급이 존재한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개념 있는 엄마의 참교육’이라는 글을 보았다. 내용은 이러하다. 한 아이와 엄마가 버스에 타는데 아이가 혼자서 오르고 싶어 했다. 엄마는 허락하는 대신 아이에게 기사님께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기다려야 했다는 것을 강조하며 다음부터는 엄마의 도움을 받아 탑승하겠다고 대답하게끔 아이를 유도한다.

나는 어느 부분에서 참교육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이 진정 아이에게 배려를 가르치는 일인가. 배려란 무엇이길래.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것? 그렇다면 아이는 혼자 하는 법을 배울 권리를 다수에게 침해당해도 괜찮다는 것인가?


프랑스에서 버스를 타면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하나는 앞서 달리는 자전거에 경적을 울리지 않으며 천천히 뒤따라가다 기회가 되면 앞지르는 것이다. 자전거는 당당히 자신의 속도로 가고 버스도 그것을 불평하지 않는다.

다음은 움직임이 불편한 사람이 탑승 시 착석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하는 기사분들이 종종 있다는 점이다. 임신한 내가 거대한 배를 안고 뒤뚱거리니 기사님은 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출발하지 않았다. 수많은 승객의 몇십 초가 중요한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아이 유모차를 끌고 타면 미리 문 앞에 가지 않아도 된다. 차가 다 멈추고서 내려도 되며 휠체어 전용 벨처럼 유모차 전용 벨도 있다. 그뿐인가. 만 두 살이 된 아이가 내 손을 잡고 버스에 오르는 걸 모두 기다려주기도 한다. 아니 기다려’ 주었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기다린다. 그들은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한다. 이런 상황에서 ‘배려’라는 말은 계급을 포함한다. 움직임이 제한적인 사람들에게 교통‘약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약자’를 위해 움직임에 제한이 없는 ‘강자’가 자신의 ‘시간과 권리’를 ‘양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존중’이라는 말을 붙이면 달라진다. 움직임의 능력 보유 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모두가 안전하고 독립적으로 버스에 탈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정부에서는 ‘이동제약자 Les PMR (Personne àmobilité réduite)’를 장애인 (시각, 청각, 지적 장애, 신체 부자유자 및 휠체어 사용자) 소인증, 짐이 많은 사람, 노인, 임산부,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든 사람,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사람 포함) 어린아이와 함께 있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반면 한국의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에서는 ‘교통약자’를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사람, 어린이 등 일상생활에서 이동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프랑스에는 ‘일반’ 버스라 불리는 계단이 있는 버스가 없다. 이동제약자들의 이동할 권리를 위해 ‘일반’ 버스를 없애고 전면 저상버스를 도입했다. 그러니까 프랑스에서는 저상버스가 ‘일반’ 버스이고 그런 이유로 버스에서 유모차나 휠체어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내가 또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은 휠체어를 탄 사람이 버스에 오르고 머무를 자리를 찾는 데 있어 미안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다 누군가 휠체어 지정석에 서 있으면 그 사람에게 당당히 비켜달라고 요구하며 비켜주는 사람도 미안해하지 않고 신속하게 비켜준다. 휠체어 지정석은 휠체어만 오를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버스 안에 자리가 없으면 그곳에 서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휠체어가 오를 때 비켜달라고 요구하는 것, 그리고 비켜주는 것이 당연했다. 서로의 권리를 당연하게 그리고 유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휠체어 자리를 만드느라 사람들이 탈 자리가 없다는 불평도 없었다. 노약자석도 마찬가지다. 계속 비워 둘 필요는 없다. 앉았다가 이동제약자가 타면 비켜주거나 이동제약자 본인이 당당히 요구할 수 있다. 

프랑스에 임산부 배려석이 없는 이유는 자신의 상대적 불편함을 미안해하지 않으면서도, 당당하게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문화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휠체어가 버스에 오르느라 지체되는 1~2분에 투덜거리지 않고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가 나 좀 앉아도 되겠냐고 했을 때 불평하며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도 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있어 당당하다.


내가 타인을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과 타인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생각은 엄연히 다르며 후자가 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거나 타인을 위해 내가 희생, 또는 양보한다는 개념의 배려는 집단의 이익을 따질 수밖에 없다.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서로를 혐오하게 된다. 모두에게 당연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존중한다면 희생을 강요하는 배려 대신 타인을 존중하며 나에 대한 존중도 요구할 수 있는 건강한 배려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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