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인문학자 도정일이 과학은 답을 찾는 학문이고 문학은 답이 없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학문이라고 했던 것 같다.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것인지 그저 답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지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과학은 세상에서 답을 찾고 문학은 답이 없다는 전제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그런 것 때문에 삶이 괴롭기도 하고 갈등을 마주하게 되기도 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하게 되기도 한다.
좋은 관계, 나쁜 관계.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과연 한 사람의 세계를 좋고 나쁨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 각자의 세계가 확장되면 좋은 관계가 되고, 각자의 세계가 만나다 융합되지 못하고 팽팽하게 맞서면 갈등하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환대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나의 세계가 조금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나를 깎고 버무리고 확장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관계 안에서 손을 잡는 행위는 깊은 의미를 가진다. 호칭과 호칭이 처음 만나 인사차 하는 악수 말고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 사이에 손을 잡는 행동은 단순하지만 의외로 마음의 두꺼운 벽을 허물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만큼 손을 잡는 행위가 가지는 파장은 엄청나다. 호감이 있는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때, 그들은 닿을 듯 말 듯 걸으며 손 사이의 온기를 느낀다. 온 신경이 손으로 가 말을 하면서도 손끝 만을 생각한다. 언제, 어떻게 잡는 것이 가장 어색하지 않을지 수 없이 생각하며 도저히 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 순간 용기를 내어 손을 잡는다. 상대가 내 손을 마주 잡는다면 그로서 관계는 호감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손을 맞잡고 걷는다. 손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먼저 손을 빼지 않는다. 손을 빼면 마치 상대의 마음을 배신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맞잡는 것은 마음을 맞잡는 것과도 같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이어진다.
성인이 된 이후에 연인 말고 다른 성인의 손을 지긋이 다정하게 잡아 본 기억이 있는가. 손을 잡는 행위는 고백과도 같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당신을 신뢰한다는, 당신을 생각한다는, 말 보다 글 보다 더 강력한 육체의 고백이다. 말이나 글은 전화, 편지, 문자 메시지 등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손을 잡는 일은 다르다. 무척 직접적인 이 고백은 육체가 만나는 행위인 만큼 더 강한 감정을 주고받게 된다. 손을 잡는 행동, 손이 잡혔을 때 그 사람의 얼굴,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손을 잡은 사람의 얼굴,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들 혹은 침묵.
엄마의 손을 잡으면 어떤 말이 나올지 상상해 본다. 일을 많이 해서 굵어진 손가락, 동그란 손끝, 주름진 피부.
“엄마도 젊었을 땐 너처럼 손가락이 가늘었어. 이거 봐, 이제 결혼반지가 이만큼만 들어가잖아.”
엄마는 네 번째 손가락 첫마디에 걸린 결혼반지를 보여주며 내게 말했다. 그때는 엄마의 마음을 잘 알지 못했다. 아내와 엄마로 살며 바꾼 개인의 인생에 대한 아쉬움 말이다. 손빨래, 요리, 청소 등을 하면서 결혼반지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굵어진 손가락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본인이 직접 보여줘도 굵어졌다는 사실만 들을 뿐 그 너머에 있는 엄마의 희생 같은 건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는 말이다. 돈 벌어 온다고 대접을 받을 수도 없었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자신 아닌 네 사람을 위해 쓸고 닦고 썰고 빨던 그 손. 이제는 굵어진 그 손. 나는 그 손을 잡고 ‘엄마 고생했네. 나 키우느라 이렇게 손가락이 굵어졌네. 너무 고맙다. 굵어도 엄마 손 참 이쁘다.’라고 말해주지를 못했다. 아빠도 여동생도 남동생도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대신 나는 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그들에게 하지 못한 말을 한다.
손이 참 귀엽네. 언제 이렇게 자랐어? 에구 손톱 깎아야겠다. 너무 예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