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는 아파트에 이사 온 지도 어언 5년이 되었다. 지은 지 십오 년 정도 된 아파트인데, 작은 정원이 딸린 것을 보고는 내부는 보지도 않고 덥석 계약했다. 겨우 세 번째로 방문한 아파트였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정원 딸린 주택은 꿈도 못 꾸는 우리에게 작지만 그래도 바깥 공간이 있는 아파트는 꼭 잡아야 할 보물이었다.
늘 작은 텃밭을 꿈꾸던 님은 이사 오자마자 정원을 재정비할 궁리부터 했다. 이사 왔을 당시 정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약간의 잔디가 전부였다. 님은 나눌 것도 없이 조그마한 정원을 둘로 나누고 한쪽은 아이들 놀이 공간, 한쪽은 자신의 텃밭을 만들었다. 채소나 과일이 자라기에는 토질이 척박했기에 님은 땅을 파고 농사짓기에 적합한 흙과 말똥을 채웠다. 말똥은 돈 주고 살 만큼이나 좋은 비료인데 그냥 주겠다는 지인의 말에 먼 길 차를 달려 얻어온 것이었다. 트럭이 아니라 도시에서 흔히 타는 자동차 트렁크에서 말똥을 내리는 님의 모습은 상당히 재밌는 대조를 이루었다.
님은 땅을 파고 그 안을 다시 채우는데 한나절을 보냈다. 넓은 면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건 기계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육체노동으로 해결되었다. 님은 오전 내내 삽질을 하다가 내가 차려주는 점심을 허겁지겁 먹었다. 바지에는 온통 갈색 흙 자국이 가득했고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흐트러져있었다. 정원 한편에는 삽이 우뚝 꽂혀있었고 님이 벗어놓은 흙 묻은 장갑이 널브러져 있었다. 상기된 볼로 맛있게 밥을 먹는 님의 모습이 참 좋았다. 한국식 식사였다면 고봉밥 한 그릇 더 퍼주고 싶은 지경이었다. 밥을 먹고 오후에는 아이와 함께 구멍을 채우는 작업을 했다. 말똥이라고 기겁했던 나는 실물을 보고 안도했다. 상상했던 적나라한 똥 모양이 아니라 거의 가루에 가까운 모습이었고 신기하게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이는 짧은 시간 아빠를 돕고 장갑을 벗어버렸다. 내가 아이랑 공을 차는 동안 님은 또다시 열심히 삽질을 했다. 해 질 무렵 님은 일을 끝내고 아이와 함께 씻으러 갔다. 그사이 나는 저녁을 준비했다. 갈색 흙먼지를 말끔하게 걷어낸 님은 상쾌한 얼굴로 저녁을 먹었고 일찍 잠들었다. 그리고 실컷 코를 골았다.
다음날, 님은 온몸이 쑤신다고 했다. 삽질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육체노동을 한 자의 뿌듯함이 있었다. 말끔하게 정리된 텃밭을 보며 님은 한껏 행복해했다. 씨앗에서 싹을 틔우고 그것을 정원에 심었다. 님은 회사 가기 전과 퇴근 후에 그렇게 열심히 정원에 나가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민달팽이를 사냥했다.
어느덧 님의 일과에는 잘 자란 채소들을 수확하는 일이 더해졌다. 벌레들이 함께 먹어 듬성듬성 구멍이 난 초록 샐러드에서 흙을 닦아내고 발갛게 익은 토마토를 씻어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님이 매일매일 열심히 돌본 채소들을 먹고 있자니 한 끼의 식사가 참 감사했다. 슈퍼에 가면 쉽게, 그리고 싸게 살 수 있는 샐러드가 사실은 이렇게 많은 노동과 정성이 필요한 것이었다니. 자연에 가까운 삶에는 요량이 없다는 것을, 노동한 자만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님의 땀에 감사했고 비와 해에게도 감사했다.
님의 땀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십오 년이 넘은 주방 가구를 전부 뜯어내고 싱크대며 찬장이며 온갖 먼지 다 뒤집어쓰고 새로 만들어낸 것도 님이었고, 아이들 이층침대를 손수 만들어주고 침대 이층에 연결된 놀이공간을 만들어준 것도 님이었다. 화장실 변기를 새로 바꾸고, 기존의 벽을 없애고 새로운 벽을 만들어 세탁기 자리를 만들어준 것도 님이다. 회사에 가지 않는 시간을 쪼개 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을 흘리며 일해 낡은 아파트를 바꾸어주었다. 자신과 나와 아이들을 위해서.
나는 그야말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육체노동을 하는 모습은 내게 늘 경이롭다. 육체노동은 요량이 통하지 않는 정직한 노동이다. 열심히 할수록 몸은 그것을 기억하고 배운다. 그렇게 숙련된 자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 나는 한 때 육체노동에 서툰 나 자신이 작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그랬다. 한평생 회사원으로 일하다 은퇴하니 할 줄 아는 게 없어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다고, 손기술 있는 사람들이 참 부럽다고 말씀하셨다.
남들보다 육체 사용 능력이 조금 떨어지게 태어난 나는, 그렇다면 아버지 말대로 그저 쓸모없는 인간일까. 그런데 또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육체노동에 서툰 대신 이렇게 글 쓰는 노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땀을 흘리거나 식탁에 먹을 것을 가져오진 않지만, 감각을 예민하게 세우고 중요한 것을 길어 올려 영혼을 채우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할 때, 노동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