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는 시간을 빼고는 늘 무언가를 본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무엇에 눈길을 주고, 그중 어떤 부분을 보는 것일까. ‘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보는 행위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하나의 척도는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름다움에 관해 고민하면서부터였다. 나는 구순열을 가지고 태어났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서른 살이 되어 결혼을 준비할 때였다. 엄마는 마치 대단한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듯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셨다.
네 입술이 그런 건 어릴 때 넘어져서 다친 게 아니라, 구순열 수술 때문이야.
엄마와 달리 나는 담담했다. 엄마는 상대방 부모가 내 구순열을 문제 삼을까 봐 걱정했지만, 나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입술이 남들과 조금 다르게 생겼다. 그래서?
하지만 그 이후 이야기는 엄마가 우려한 대로, 주말 연속극처럼 흘러갔다. 상대방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했고, 자식 몰래 나에게 연락해 헤어지라고 요구했다. 나와 연인은 친구들을 모아 언약식을 하고 도망쳤지만,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이. 사람은 왜 눈에 보기에 예쁜 것을 쫓을까. 그렇다면 예쁘고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나처럼 입술과 코가 비대칭이면 아름답지 못한 사람인가. 그게 정말 누군가에게 배척을 당할 만큼의 추함인가. 추하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배척을 피하고자 열심히 화장하고, 예쁜 옷을 사고, 성형해야 했을까. 그런 행위들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누구를 위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일까. 나? 타인? 그것이 진짜 아름답기는 한 걸까.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해변의 여인>에서 영화감독 중래는 실체는 끊임없이 물결치는 곡선이 원을 이룬 형태라고 말한다. 우리가 현상이나 사물의 어느 부분을 보느냐에 따라, 그게 원에 가까울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모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많은 점을 볼수록 실체에 가까운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설명] 왼쪽의 원을 이룬 물결 모양이 실체이고 그 주변의 점들이 바로 우리가 대상에서 보는 것들이다. 그 점들을 이어 보면 실체와는 전혀 다른 모양이 만들어진다.
이 장면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은 실체를 보려는 노력과 같다고 생각했다. 대상에서 내가 보고 싶은 점만 고르지 않고, 대상의 모든 점을, 원 모양의 실체를 볼 수 있다면, 거기서 (남들이 알려준 아름다움이 아닌) 그 대상만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나를 배척했던 사람들은 아마도 나라는 원을 이루는 수많은 점 중에 몇 개만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과는 다른 모양이라며 겁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원이다. 인종, 성별, 외모, 성정체성, 무엇이 되었든 우리를 정의하려고 애쓰는 그 모든 단어를 넘어, 우리는 사실 모두가 원이다.
그리고 나는 가능한 많은 점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