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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一)물. 연습

사진을 찍다 보니

혼자 놀기에 진수를 보여주겠다는 포부로 시작한 사진 출사. 섬에서 지내며 적적함과 꿀꿀함을 달래려고 나름대로 고민하고 들어선 길이 이젠 어디서나 자랑스럽게 소개할 수 있는 취미가 됐다. 사진에 글을 곁들면 진심이 느껴진다는 사람도 있었다. 가독성이 좋다며 다음 글은 언제 올리냐는 이도 있었다. 단순히 즐거움을 가지려고 마음먹었던 초심(初心)이 시간이 지나니 변했다. 대중이 인정하는 결과는 곧 좋은 시선을 기르고 작품으로 담아서 표현해내는 게 아닐까? 욕심이 늘었다. 


2019.11.20. 압해도. 명암


책방에서 카메라 다루는 법이나 잘 찍는 법이 쓰인 책을 집기를 마다하고 현장에 자아를 던져놓기를 수년째 반복하던 청년은 언젠가부터 다른 사진작가의 작품집을 사 읽기 시작했다. ‘내 시선이 이 세상에 전부는 아닐지 몰라.’ ‘어떤 게 주제로 다루어지는지 궁금해.’ ‘좀 더 넓게 보고 싶어.’ 공장, 항구, 농촌, 어촌, 산촌, 장터 등 이미 수많은 소재가 작가 각각의 시선으로 해석되어 세상 빛을 보았다. 제 아무리 분초를 다투는 순간을 빛과 속도로 담아냈다고 할지라도 셔터를 한, 두 번 눌러서는 이렇게 멋진 작품을 얻기가 힘들었을 거야. 원하는 풍경에 행인이나 개, 고양이와 같은 동물들이 담기도록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무르며 기다렸을 수도 있을 테고. 작가의 사진집에 수록된 사진은 청년에게 말을 걸어왔다. 풍경은 따뜻한 감동이나 냉혹한 차가움처럼 온도로 전해지기도 하였고 측은지심(惻隱之心), 동병상련(同病相憐)과 같은 마음을 움직이는 손짓으로 자아를 이끌기도 하였다.   

2019.11.20. 압해도. 계절이 피다 지는 요즘이다.


문자와 달리 이미지는 페이지를 넘기는 손에 속도를 붙여내어 금세 한 권을 정독하도록 하였지만 때마다 잔상을 남기어 또다시 찾아보게 하였다. 카메라가 손에 익는 과정일까? 일상에서도 심경의 변화가 있으면 사진집을 찾아 더듬었다. 타인의 시선을 훔쳐보고 촬영 주제로 잡는 건 도둑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 ‘참고하면서 더 좋은 눈을 가지면 돼지.’라고 제 멋대로 해석했다. 어차피 지난 기록을 재현해내는 건 불가능하니까. 


작품을 마음에 저장하여 출사 길에 오르는 전과 후는 크게 달랐다. 무제한으로 이미지를 저장할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의 셔터를 마음껏 누르던 지난 시절을 비웃기라도 하듯 풍경을 관찰하고 구경하는 시간을 늘렸다. 시·공이 배출하는 공기나 분위기에 몸을 달구는 예열로 의식을 시작했다. 손수레를 끄는 사람, 바다를 가로진 고깃배, 오후의 볕을 받아 따스하게 젖어드는 폐가. 타이밍이 중요했지만 어수룩하게 외경(外境)만 담았다간 결과를 두고 어떤 느낌이었는지 당최 알 수 없었다. 늘 생각했다. 사진을 보고 느끼는 타인의 눈과 마음이 나와 꼭 같았으면 좋겠다고. 



2019.11.20. 압해도 그늘



오후의 공기가 차지만 가을볕이 따스하게 내려앉는다. 방 안에서 책을 읽거나 자질구레한 소일로 시간을 보내는 계절이지만 이 볕이 싫지 않아 앞마당으로 향했다. 국화꽃이 간절하게 꺼져가는 빛에 얼굴을 들이미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카메라를 챙겨 왔다. 찰나에도 활짝 피고 싶어요. 공기에 뜬 약간의 온기와 산소를 머금어 추운 밤을 이겨내겠어요. 꽃은 말로 다 하지 못하고 온 몸짓으로 아쉬움을 토로하는 듯하였다. 명암의 조화에 밝고 어두운 공간이 균형을 이루다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오래간 하늘엔 달달한 귤빛이 감돌았다. 한편 반대편 하늘엔 새파란 바다가 검게 물들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던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늘진 국화를 뒤로하고 이미지를 컴퓨터에 옮겨 실었다. 몇몇의 풍경은 원하는 대로, 또 몇몇의 사물은 의외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문득 카메라라는 기계를 생각했다. 이 기계가 내 눈과 같았으면 어땠을까? 순간을 기억하는 신묘한 재주가 있었다면 아마도 사진 찍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을까? 원하는 풍경 그대로 담을 수 있다면 혼자 놀기에 더없이 좋은 취미에 곧잘 실증을 느꼈을지도 몰라. 너의 눈이 내 것과 같지 않아서 다행이야. 우린 서로 다르니까 내일도, 모레도 네 몸을 내가 떠받들고 다녀야 하지 않겠어? 


작가는 결과를 장담하거나 확신하지 못한다. 아니하지 않는다. 수많은 변수가 도처에 있으니 말이다. 지나친 겸손이라며 너무 낮추지 말라며 손사래 치는 이도 만난 바 있지만 청년은 늘 강조한다. 사진은 연습입니다. 훈련이고요. 결과를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저 진심이 담겨서 잘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2019.11.20. 압해도.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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