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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휴 Jul 15. 2023

보랏빛 내 친구들 1

지인이 분양해 준 송엽국을 농장 자투리 땅에 심었더니 예쁘게 피었다. 분홍과 보랏빛을 품은 꽃을 보며 추억 속에서 가끔 꺼내보는 친구가 떠올랐다. 미를 마지막으로 본 건 고교 졸업 후, 막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였다. 보라색 체크 투피스를 입었데 내가 알던 모습과 달리 밝게 잘 웃었다. 경기도로 이사를 간다는 말을 하러 왔는데 아마도 그때, 우리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할 것을 짐작? 아니, 다시 오지 않겠다고 작정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산골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함께 다녔다. 미는 긴 머리를 양갈래로 땋았고, 피부도 하얀 편이었다. 조용하고 말이 없었으며 친구들보다 어른스러웠다.


중 3 , 모둠별로 앉게 되었다. 한 모둠에 4명씩 앉았는데 우리 모둠에 미와 친한 S가 있었다.




S는 모두 가난한 시절의 가난한 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형편이 어려운 친구였다. 부모님이 계셨지만 글도 모르시는 분들이라 S가 집안일을 어른처럼 처리했다. 가진 논밭도 없어서 남의 일을 하신다고 들었다. 가난한 집에 자식은 또 대추나무 연 걸리 듯 많아서 오빠와 언니도 있었지만 배움이 미천하여 내세울만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타지에 살고 있었다. 동생들도 넷이나 있었다. 그 집에서는 S가 개천의 용으로 가장 역할을 했다.


S는 점심 도시락도 못싸 오는 날이 많았다. 우리는 함께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S의 집은 거의 매일 사건 사고가 생겼다. 엄마가 다치거나 아빠가 쓰러지고, 어떤 날은 S가 동생과 나무하러 갔다가 낫에 다리가 잘려 힘줄이 끊어지기도 했다. 배가 아프다고 머리가 아프다고 양호실에서 약도 자주 타 먹었고, 가끔씩 쓰러졌다. 어린 마음에도 친구가 영양실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시간이 아닐 때는 S야말로 밝고 통통 튀는 친구였다.


우리 네 사람은 다른 친구들이 눈총을 주는 줄도 모르고 깔깔거리며 지냈다. 쉬는 시간에 떠드는 것으로도 부족해 수업 시간에도 쪽지를 주고받으면서 낄낄거렸다. 그때는 왜 그렇게 웃을 일이 많았을까. 서로 눈만 마주쳐도 눈웃음쳤고, 볼에 보조개가 쏙 들어갈 만큼 자꾸만 밀어 넣어도 웃음이 삐져나왔고, 건드리기만 해도 웃음이 풋풋 뿜어져 나왔다. 요새는 중2가 제일 무섭다는데 나는 중학교 시절이 제일 좋았다. 빨대처럼 코를 박고 읽어대던 문학전집도 좋았고, 우정을 맹세하던 유치 찬란한 친구들도 좋았다. 가정형 편의 내막을 몰라서 천진할 수 있었던 거였다.

미는 그런 우리를 마치 어른처럼 관찰하며 내려다보듯 나무랐다.

"너희들이 자꾸 S를 받아주니까 S가 더 약해지는 거야!"

"그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하도 어른스럽게 말을 해서 우리들은 무어라 논리적인 대답도 못했고 우리끼리만 쪽지를 주고받았다.

'함께 있어주고, 함께 웃어주는 것이 더 좋은 친구 아니야?'

'그래, 그렇지 않으면 누가 S의 이야기를 들어줘!'

'우리가 맞아! 우리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자!'

'어려울 때 돕는 것이 진짜 친구지!'




우리는 사실, S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친구니까, 내가 친구 같고, 친구가 나 같아서 저절로 웃고 떠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재잘재잘 거렸다. 모두들 자신의 슬픔은 덮어 두고 친구들 앞에서 웃으며 슬픔도 옅어지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S가 아프다고 하면 함께 양호실을 갔고, 속상한 이야기를 하면 함께 울었던 것이다. S가 눈을 반짝이며 하는 말에 귀를 쫑긋하고 들었으며 박장대소로 웃어넘겼다. 가끔은 미가 S와 가까워지지 못해서 우리를 질투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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