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껄끄러운 중3 때, 미의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무슨 암이었다고 들었다. 미는 더 말이 없어졌고, 졸업식 때는 눈물 가득한 얼굴로 우리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모두 흩어져서 고교를 진학했다. 같은 도시였기에 아주 가끔 자취방을 오가기도 했지만, 학교가 달라서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중학 때부터 시를 잘 쓰던 미는 시작노트에 깊고, 슬픈 내용의 시들을 써 두었다가 보여주기도 했다. 황톳길, 푸른 화원 등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시를 쓰며 달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린 너무 어려서 속내를 보이며 이야기하는 법도 잘 몰랐고,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이 친구를 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조심스러웠다.
S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실업계 야간학교를 갔고, 낮에는 생산직 공장에 다녔다. 입주 가정도우미로 있다가 오래 있지 못할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내가 부모님께 무릎 꿇고 앉아 허락을 맡은 후에 내 자취방에서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당시에 내 자취방에는 2살 터울 위인 오빠가 고3이었는데 근처 학교 기숙사에서 잠을 자고 아침과 저녁을 먹으러 왔기 때문에 부모님께서 완강히 반대를 하셨다. 또한, 내 공부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하셨다. 부모님의 허락이 떨어진 후에, 우리는 그제야 낯선 도시, 낯선 학교에서의 외로움을잊고 중학교 시절의 밝고 쾌활함을 되찾았다. 잠 안 자고 공부를 했으면 오죽 좋았겠는가만, 우린 부모님의 예감을 뛰어넘지 못했다. 매일 수다가 밀려서 교과서는 더 멀리했다. 새벽 2시까지 떠들다 잠이 들곤 했다.
S는 여전히 가난해서 집에서 쌀이나 반찬 등을 가져 올 형편이 못되었다. 고 2부터는 연년생인 내 동생이 고교를 진학하면서 나와 함께 살아야 해서 S는 따로 방을 얻어 나갔다. 함께 있지 못해도 늘 마음이 쓰였고, 가난한 그와 함께 할 형편도 못 되는 내가 슬펐다. 그렇게 자매 같던 S는 내내 우울한 고교생활의 깊은 원인이었다. S는 그 후로도 많이 아팠고, 늘 나에게 의지하려 했다. 나는 그런 S의 삶이 한없이 안타깝고 내 일처럼 슬프기만 했다. 세월이 흘렀어도 아주 가끔은 만나기도 하고 가끔은 안부를 묻기도 하지만, 그때처럼 형편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
그날, 미는 나를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깔깔거리며 떠들어 댔다. 고등학교에서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하하거려서 의아했다. 중학교 때 우리를 비난했던 네가?
미는 다시, S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 너희들이 옳았던 것 같아..."라고 말했다.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며 눈물 맺힌 눈을 먼 곳에 주었다.
미는 대학 진학은 못하고 가정 형편상 옷가게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후로도 내가 가끔 연락했지만 반겨하지 않는 것 같아 계속 연락을 못했다. 미는 S의 안부를 묻기는 했지만, 직접 연락은 하지 않았다. 이만큼 나이를 먹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철이 들어도 많이 외로웠겠다. 그 어린아이가 짙은 외로움의 무게를 어떻게 버텨냈을까. 보랏빛은 그날 미의 눈에 맺힌 눈물 같은 색이다. 보랏빛 투피스가 왠지 더 쓸쓸해 보였다.
미는 가장 예쁜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헤어지던 날 헛헛하게 웃던 얼굴이 가끔 생각났다. 한 동네에 살던 친구들도 미의 연락처를 몰라 나도 마음에 묻었다. 가끔, 글 잘 쓰는 그가 필명으로라도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온통 보랏빛이던 미가 어디에서든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잘 살고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은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던 사월의 꽃샘추위였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