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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내야 하는 사명감으로

― 윤혜숙 장편 소설 『말을 캐는 시간』(서해문집, 2021)을 읽고

by 민휴

윤혜숙 작가의 단편 동화 2권과 장편 동화 네 권에 이어 청소년 소설을 마주했다. 그의 책들을 읽으면서 옛날에 있었던 놀이나, 옛날이야기, 옛날 사람들의 생활 모습 등을 읽을 때 더 정감이 가고 그런 것들은 나도 조금 아는 것 같아 공감이 많이 갔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어린이들에게도 부모의 어린 시절과 더 윗세대인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떻게 살아오셨는가를 책의 곳곳에 자주 설명하고 있어서 세대 간의 유대감을 중시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캐는 시간』은 역사적 사실을 청소년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사명감으로 집필했을 것 같다. 사실과 다른 것을 독자들에게 읽힐 수 없기 때문에 시대적 배경이나 다른 책들의 자료까지 많은 자료조사를 했다는 설명을 듣기도 했지만, 그만큼 정성을 들인 책이기 때문에 책이 완성되었을 때 정말 뿌듯하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작가의 말을 통해 자료조사와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 반대 시위, 국회 공청회 등을 다니며 원고를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슷한 내용의 영화 ‘말모이’가 먼저 상영되면서 책의 출판이 늦어졌다고 한다. 한글박물관을 방문하고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서 배재학당 창립 130주년 특별전시회에 다녀온 것이 계기가 되어 연구를 거듭하여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어학회의 시골말 캐기 운동, 배재고보 문예부의 교지 복간, 춘천고보의 상록회 사건을 중심에 놓고 나머지 대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 나간 이야기다”라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로 “대공황 이후 총독부가 박차를 가한 농촌진흥운동은 얼마 후 본색을 드러냈다. 저수지를 만들고 품종을 개량하고 화학비료를 써 쌀 생산량을 두 배 가까이 늘었지만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쌀은 예전보다 다섯 배나 늘었다. 뼈 빠지게 일해도 소작농들은 거의 대부분을 세금으로 뜯겼고 도시로 밤도망을 가거나 꿈의 땅인 만주나 북간도로 떠났다.”(「변심」중에서)라고 밝히고 있다.




고등부 1학년 민위의 고향은 춘천이다. 동네 수재였던 우등생 민위는 소작인들의 마음을 얻고 총독부의 눈에도 들려는 부농의 후원으로 학교에 올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서도 1등을 하는 모범생이다. 그렇지만, 후원자가 지속적인 감시했기 때문에 부담감도 크다. 글쓰기도 잘해서 문예반 담당인 박 선생은 민위를 문예반에 들어오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학업에 방해가 되거나 총독부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거절한다.




같은 반 규태가 연애편지를 잘 써보겠다고 문예부에 들어갈 것을 고심하다 민 위를 설득한다. 과외 자리를 주선한다는 조건으로 함께 문예반에 들어간다. 규태는 순사부장의 아들이라 민 위는 꺼림칙했지만, 과외로 돈을 벌면 동생의 학비도 보탤 수 있을 거라는 마음에 바쁜 시간을 쪼개서 과외를 하기로 한다. 문예 부원이 된 규태는 몰라보게 달라진다. 학업성적도 오르고 교지 복간 활동이나 시골말 캐기 등의 활동에도 적극성을 보이고 수업태도도 좋아진다.




민위는 우연히 알게 된 일본인 여학생으로부터 “조선사람들은 글자고 있다면서 왜 사전을 안 만드는지 몰라”(「여학생 노리코」중에서)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조선어학회에서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는 사전 편찬 활동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문예반에서는 조선말 사전을 편찬하는 조선어학회를 돕기 위해 사투리 채집에 나선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자기 고향으로 가면서 시골말 캐기 잡책을 가지고 간다. 각 고향에서 쓰는 사투리와 뜻을 적으며 말을 모은다. 민위는 상록수처럼 고향에서도 뜻있는 사람들의 힘을 모아 야학당을 연다. 농사짓기도 바쁜 사람들의 시큰둥한 반응을 걱정했는데 야학 시간이 되자 한두 명씩 몰려드는 사람들! 그 장면에서 뭉클해져 울뻔했다. 시골 사람들의 말에서 사투리를 채집해 ‘조선어 사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민위는 사람들이 한글의 원리를 알고 쉽게 따라 배울 수 있도록 “한글 자모표”를 개발하여 공책에 그려서 공부하도록 해 준다. 한글을 배우고 조선어 사전을 만드는 것은 조선의 얼을 살리는 일이어서 일본의 내선일체에 반하고 천황을 배반하는 행동으로 엄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비밀리에 일이 진행되지만, 형사들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야학은 서둘러 문을 닫는다. 급기야 ‘조선어학회’는 감시의 눈을 피해 지하에 숨겨 두었던 사전 원고를 민위의 기지로 인해 순사부장 아들인 규태네 광속 항아리에 원고를 옮긴다. 문예 부원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원고는 지켜지고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은 비밀리에 계속된다.




「시골말 캐기 잡책」에서

“시골말 캐기 운동이 조선말을 조사하면서 조선 사람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게 했다는 게 그 이유야.”

일제의 온갖 강령과 정책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시대였다.

“그래서 총독부의 눈에는 사전 편찬 사업이 항일투쟁보다 더 위험하고 조선어학회를 의열단보다 더 지독한 ‘독립운동단체’로 몰아 압박하는 거지.”라고 이 책의 주제를 밝히고 있다.




「소년 주필」에서 “조선아 일어나라. 화살을 날려라. 조선 혼 담긴 그 화살, 돌인들 두려우랴. 시위를 당겨 쏴라. 동방을 향하여!”라고 외쳤다고 한다. 소년 주필이라고 촉망받는 ‘신영철’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의 형은 조선어 연구 활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춘천경찰서에 잡혀가 심하게 고문을 당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새로운 시간」에서 “사전 편찬은 조선인의 말을 되살리는 일이니, 독립운동이나 진배없소. 엄밀하게 말하면 천황과 우리 총독부의 정책에 맞서는 반역 행위요. 치안유지법에 위배된단 말이오.”라고 일본인 형사부장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분들도 계셨고,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인 ‘조선어’를 지키기 위해서 사재를 털어 사무실을 내기도 하고, 형사들의 눈을 피해 말을 모아서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느라 연구한 분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시골말 캐기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현재의 초등학생이나 중고등학생에 해당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 놀랍고 민족의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그렇게 목숨 걸고 지켜낸 소중한 우리말을 아름답게 사용해야겠다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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