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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오다

임경섭

by 민휴

오늘의 시 한 편 (18).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빛으로 오다


임경섭

엄마 엄마

오늘 과학 시간에 선생님이 말했어요

모든 것이 빛으로 존재한다고요

빛이 없으면 서로를 확인할 수 없다고요

빛이 있어서 모두가 함께할 수 있다고요


그럼 엄마

내 앞에 있는 엄마는 엄마인가요 빛인가요

어느날 엄마가 사라진다면 그건

빛이 사라진 거니까 엄마는

보이지 않을 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건가요


집에 오다 누군가 담벼락에 적어놓은

휴거라는 글자를 봤어요 무서워요

모두가 사라지는 날이라잖아요

그 길이 어두웠다면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면

이런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을 텐데

엄마, 오늘밤엔 불을 끄지 말아줘요

불을 끄면 내 방도 사라지고 내 잠도 사라지고

엄마를 위해 모으던 동전들과

어린 동생을 위해 적어놓은 기도문들도 사라질 거예요


그래도 불을 꺼야 하겠죠?

이제야 알겠어요 밤이 왜 존재하는지

밤이 오면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죠

우리가 사라져야 그동안 또다른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테니까

그리고 또다시 아침이 오면 우리는 전혀 다른 빛으로

서로 다른 빛으로 태어나겠죠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밤이 오면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죠

우리가 사라져야 그동안 또다른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테니까

(벅찬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은 날도 있었다. 이곳이 아닌 곳으로 누군가의 누구가 아니라, 나만을 위한 곳으로 가버리고 싶었다. 여행 가방을 만지작거리기도 했고, 한밤중에 외출복을 꺼내보기도 했다. 매번 보이지 않는 것들에 발목이 잡혔다. 밤에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사라짐의 시간이 또 다음 날 아침에 다른 빛으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빛으로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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