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세계테마기행 프로그램에서 스페인 편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이 나왔다. 프랑스에서 시작한 길의 800km를 넘어 종착지라는 피니스테레는 넓고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자신을 찾고자 고난의 길을 선택해서 끝까지 걸어온 사람들의 보람찬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세계적인 순례길인 산티아고는 꿈도 못 꾸겠고, 우리나라에도 한국의 산티아고라는 이름으로 순례길이 많이 만들어졌다고 검색이 되었다. 강원도의 운탄고도도 멋있을 것 같고, 충남의 버드내 순례길도 의미가 클 것 같았지만, 우리 가족 휴가가 가능한 일정으로는 거리의 제약 때문에 시간이 빠듯했다.
달마고도 둘레길을 완주하면 해남군청에서 완주증과 메달까지 보내준다는 것을 알았다. 휴가 때마다 험한 산으로 이끄는 남편에게 ‘이번 휴가는 달마고도 둘레길을 가자’고 선수를 쳤다. 거기를 가면 뭐가 좋으냐, 왜 거기를 가고 싶느냐며 나의 결심을 몇 차례에 걸쳐 검증한 후, 휴가 스케줄 안에 달마고도 둘레길을 포함시킬 수 있었다.
달마고도는 남쪽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달마산 둘레길로 총길이 17.74km, 예상 소요시간 7시간이다.
‘천년의 세월을 품은 태고의 땅으로 낮달을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개통한 달마고도는 미황사와 해남군청이 기획해 만들어진 순례길이다. 미황사에서 큰 바람재, 노지랑 골, 몰고리재로 이어진다.
전체 구간이 땅끝 천년 숲 옛길이다. 구간마다 미황사, 도솔암, 동백나무 군락지, 편백나무 숲, 튤립나무 조림지 등 역사자원과 아름다운 다도해의 풍광이 펼쳐져 있다.
이번 여행은 제대한 큰 아들이 작은 아들을 야무지게 챙겨서 앞섰기 때문에 출발이 순조로웠다. 오후 늦게야 하산할 예정이라 두 개의 배낭에 물과 간식도 충분히 넣었다. 여러 번의 산행에서 가방이 다소 무겁더라도 필요한 것들은 챙기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산에서는 무언가 부족할 때 대처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발걸음이 늦는 나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 봐 부지런히 따라 걸었다. 달마고도 둘레길은 외부의 자재와 장비 없이 모든 길을 사람의 힘으로 만들었다. 산길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험한 산에서 땀 흘리며 수고한 사람들이 고마웠고, 누군가의 마음이 깃든 길이라고 생각하니 특유의 구불거림까지 정답게 느껴졌다. 마음속의 먼지까지 쓸어줄 것 같은 맑은 바람도 깨끗한 하늘을 보며 걷는 숲길도 좋았다.
한 시간 넘게 빠르다 싶은 걸음으로 걸었다. 언제부턴가 고관절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계속 걷다 보면 풀리겠거니 생각하고 속도를 조금 늦춰서 걸었다. 두 시간쯤 지나자 고통은 점점 심해졌다. 발을 떼기가 힘들었다. 쉬어가자고 일행을 멈추게 했다. 바위를 찾아서 쉬었다. 물도 마시고, 간식도 먹었다.
아이들은 여섯 개의 스탬프 찍는 곳을 확인하며 스탬프를 찾아 찍었다. 걸어온 거리도 가늠할 수 있어서 산행의 즐거움을 찾는 것 같았다. 나는 고관절의 통증이 점점 심해져 마음 같아서는 뒤돌아서 산을 내려가고 싶었다. 달마고도를 가보자는 마음이 오래전부터 있었고, 이미 둘레길에 한참 들어 선 상황이라 계속 가기로 했다.
고관절이 아프다고 가족들에게 말하고 걷는 속도를 더 늦출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먼저 출발해 스탬프 구간에서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점심을 먹고 출발하려는데 남편이 도솔암을 오르자고 했다.
둘레길에서 300m 산 위로 올라가라는 안내문이 보였다. 망설이는 우리들을 향해 "다음에 또 오기는 어려울 거야. 여기 도솔암이 진짜 멋있다고 선배가 알려 줬는데 이번에 가 보자."라고 설득했다
도솔암은 선운산에 있는 줄 알았는데 달마산에도 도솔암이 있었다. 선운산 도솔암 입구의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과 도솔암으로 오르던 바위들 그 위에 펼쳐진 수려한 풍경의 도솔암이 떠올랐다. 달마산 도솔암도 최고의 경치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라도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웠다. 도솔암에서 바로보이는 풍경도 파란 하늘과 함께 최고였다. 도솔암이라는 이름도 어감이 좋았는데 최고의 풍경엔 도솔암이 있는 듯했다.
그날의 산행은 나의 부실한 체력 때문에 8시간이 걸렸다. 미황사로 돌아와 스탬프북을 미황사 종무소에 접수했다.
고관절의 통증이 사라질 무렵, 해남군청으로부터 두툼한 소포가 도착했다. 완주증서와 메달이 들어있었다. 그날의 고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고관절로 손이 갔다.
각자의 이름이 적힌 완주증서를 보며 자신만의 달마고도 둘레길 산행을 추억했다. 끊어질 듯 이어지며 좁아서 찬찬히 걸어도 되는 다정한 길들이 떠올랐다. 세계에서 이름난 산티아고 순례길도 좋겠지만, 언제든 마음먹으면 찾아갈 수 있는 달마고도가 가까이 있다는 것도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