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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안 Jul 19. 2023

2. 숙제

휴.. 개인 서류 정리에 두 달을 보낼 줄이야.

NIW 담당 변호사를 선임한 후에는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될 줄 알았다. 준비해야 하는 서류도 대충 파악되었고, 가장 중요한 추천서를 부탁드릴 분들도 이미 선임해 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 달 정도면 모든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5월에 계약하였으니, 6월에는 서류를 완성하여 제출하고, 3개월 정도 뒤인 9월쯤에는 이민국의 1차 판결을 받을 수 있겠지.. 그런데 계약 다음날 변호사님으로부터 전달받은 준비 서류 리스트를 본 후부터, 일이 꼬여가기 시작했다.


우선 청원인의 연구 이력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시고요. 각각의 영역에서의 본인 역할과 업적을 '객관적인 증거자료'로 증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추천서를 3분에서 받으셔야 하는데, 되도록이면 이 전문 연구 영역당 한 명씩을 선정해 주시면 좋습니다. 청원인이 받으신 수상 이력이나, 언론 보도 내역, 외부기관에서의 초청 강의나 학술 발표, 위촉 내역등을 준비해 주시고, 미국 이주 후의 연구 활동 계획서를 상세하게 작성해 주세요. 미국에서 연구 활동을 같이 하실 분의 협력의향서도 필요합니다.


첫 번째 든 생각은, '이럴 거면 내가 직접 하지 왜 변호사를 선임하나?'였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이 리스트를 채우기에 내 인생이 너무 부족한 거 아니냐'였다. 그러한 반항심과 자괴감이 '한 달이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했던 내 의지를 꺾었고, 그 한 달 동안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방황하며 지내버렸다.




불만의 시간이 지나고 난 후, 변호사님의 말씀을 곱씹어 보니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청원인의 연구 스토리 라인이 탄탄해야, 이민국에서도 이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테니까. 과거의 내가 무엇을 하였고, 현재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미래의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가 명확해야 했다. 내가 느낀 당혹감은 사실 이 부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었고, 그건 NIW를 진행하기에는 사실 준비가 덜 된 상태라는 의미와도 같았다. 


과거의 나에 대해서 정리하기 위하여, 예전 자료들을 다시 찾아본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CV를 마지막으로 정리한 것이 2019년이었다.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하면서, 계열사 전배를 신청했던 그때 이후로는 진로 고민을 따로 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면서, 회사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했던 그 많은 일들이, 내 이력서에는 한 줄 밖에 기록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력서 관점에서는 많은 일을 얇고 넓게 경험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작년에 게으름 피우지 말고, 논문이라도 한편 써둘걸이라는 후회도 몰려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30대 때의 나는 지금보다는 더 치열하게 살았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지금의 생활이 너무도 편하다 보니 무언가 더 배우고 도전할 생각을 안 한 지가 벌써 2년이 넘었던 것이다. 


막막하게 생각하였던, 수상기록, 언론 보도, 위촉장, 초청 강의등도 얼추 빠지지 않게 준비하였다. 작년과 재작년에 모교에서 특강을 진행했던 부분이 나의 강의이력을 채워주었고, 5년 전에 Task 활동을 하면서 받았던 연구대상 등이 내 수상 이력을 채워주었다. 언론 보도는 내 이름이 직접 나온 부분은 찾지 못하였지만, 우리가 진행한 프로젝트로 양산을 하였다는 회사의 보도 기사를 찾아냈다. 10년도 전의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검색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고, 회사 자료이다 보니, 외부로 반출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 애를 많이 먹었다. 무엇보다 회사원으로 15년을 지내고 나니, 내 이력에서 회사 이름을 빼고 내 이름이 들어가는 경우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이래서 회사에서 퇴직하며 그 타이틀을 떼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이만큼이라도 채울 수 있는 활동을 한 것이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가, 이만큼 밖에 채울 수 없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온탕과 냉탕을 수없이 오갔다. 


추천인 선정과 추천서 초안 작성이 가장 어려웠다. 애초에 내가 선정한 추천인은, 내가 부탁하기 편한 선배들로 선정하였었는데, 변호사님이 강하게 반대하였다. 스토리 라인에 맞는 테마에서 고르라 하셨고, 나와 되도록 먼 거리의 사람들을 고르라 하셨다. 문제는 이 NIW 활동을 나는 지금 당장 회사에 알리고 싶지 않다는 점. (누가 좋아하겠는가!) 내가 쌓아온 전문 영역과 관련된 인물이어야 하지만, 지금 내 주변의 회사인들과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의 교집합을 찾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새롭게 선정한 분들께 어렵게 말을 꺼내니, 어려운 도전을 결정한 것에 지지를 보내주었고, 흔쾌히 승낙을 해주셔서 고마웠었다. 다만 추천서 초안은 내가 쓰기로 하였는데, 아무리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한다 하여도, 내 과거에 대한 '자화자찬'을 하는 겪이라 쓰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변호사님 검수를 거치면 더 '그럴듯한' 활동으로 포장이 된다고 하는데, 그 추천서를 추천인들께 어떻게 전달할지, 벌써부터 난감하다.


그래도 가장 의미 있었던 점은, 향후 연구 계획서를 작성한 시간이었다. 써야 한다니 붙들고 앉아서 쓴 격이었지만, 덕분에 '그래서 정말 미국에 가면 무엇을 할 건데?'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져 보았다. 물론 아직도 정확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몇 가지 케이스를 세워볼 수는 있었고, 앞으로 일 년의 시간 동안 무엇을 알아보고 정해야 할지 정도의 계획은 세워볼 수 있었다. 아무리 지금의 일이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이 분야에서 나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였고, 그곳에서 어떤 일이든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면 결국은 실패를 인정하고 돌아와야 한다는 점도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다. 

 


오늘 오후 휴가를 내고, Minor 한 서류들까지 모두 준비하여 송부를 하고 나니 홀가분한 기분이다. 중2 아들이 기말고사를 앞두고 공부하기 싫다고 베베 꼬아가며 시험 끝나기 만을 기다린 꼴이 아주 우스웠는데, 지금 보면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변호사님이 숙제 검사하고 나면 2차 숙제가 날아오겠지. 그때 까진 좀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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