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등 위에 깊게 파인 외길

15. 안경

by 김민경


안경


세상을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그는 두 귀에 제 몸을 걸었다.


자식의 서툰 글씨를 펴 읽고

멀리 오는 비보를 먼저 가려내느라

안경알 위로 세월의 잔금이 자욱하다.


헐거워진 다리가 콧날을 타고 내린다.

제 몸을 깎아 낸 나사가 마모된 만큼

자식의 시야는 한 뼘 더 밝아졌을 것이다.


흘러내리는 무게를 다시 밀어 올릴 때마다

손끝에 닿는 것은 세상에 초점을 맞추려 애써온

휘어지지 않는 고집이다.


기어이 누군가의 앞날을 열어두려던,

콧등 위에 깊게 파인 외길 같은 흔적.



-



어머니의 안경알 위에는 세월의 잔금이 자욱하다. 가까이서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그저 빛이 굴절되는 각도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문득 마주한 유리알 속에는 닦아낼 수 없는 미세한 실금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미용실의 독한 약품과 손님의 머리카락, 그리고 당신이 내뱉은 고단한 숨결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화석 같은 흔적들. 안경을 쓰지 않는 나는 결코 알 수 없는, 오직 렌즈를 신체의 일부로 받아들인 이에게만 허락된 마모의 기록이다.


어릴 적 내 눈에 비친 어머니의 안경은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마법의 도구였다. 시력이 지나치게 좋았던 나는, 렌즈 너머로 세상이 일렁이고 왜곡되는 그 기이한 풍경을 동경했다. 어머니가 외출을 준비하며 화장대 위에 안경을 잠시 내려놓을 때면, 나는 몰래 그것을 집어 들어 내 콧등 위에 얹어보곤 했다.


눈앞이 어지럽게 뒤틀리고 바닥이 쑥 꺼지는 듯한 아찔한 감각. 그 불완전한 시야가 나에게는 어른들의 세계로 입장하는 비밀 통행증처럼 느껴졌다. 나도 엄마처럼 코 위에 저 매끈한 유리알을 얹고 싶다고, 철없는 투정을 부리던 시절이었다. 내게 안경은 동경하는 어른의 표식이었고, 내가 아직 닿지 못한 우아한 세계의 창이었다.


하지만 그 투명한 창 너머의 진실을 목격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빛바랜 앨범 속,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어린 스물둘의 앳된 얼굴 위에도 커다란 안경이 얹혀 있었다. 우리 언니를 낳고, 아버지가 알코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어머니는 그 안경을 고쳐 쓰며 미용실 거울 앞에 서야 했다.


홀로 두 딸의 생계를 짊어진 어머니에게 미용실은 일터이자 전쟁터였고, 안경은 가혹한 현실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패였다. 내가 동경했던 그 매끈한 유리알은 사실 들이치는 삶의 비보들을 누구보다 먼저 가려내고, 가계부의 숫자를 억지로 맞추기 위해 초점을 맞추던 고독한 렌즈였다는 사실을 어린 나는 알지 못했다.


어머니의 안경다리가 콧날을 타고 흘러내릴 때마다, 젖은 손을 앞치마에 쓱쓱 닦고 안경을 치켜올렸다. 힘든 하루를 어떻게든 버텨내려는 다짐 같았다. 제 몸을 깎아 낸 나사가 마모되는 줄도 모르고, 어머니의 시선은 오직 자식의 앞날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세상의 채도를 선명하게 감각하며 성장하는 동안, 어머니의 세계는 조금씩 빛을 잃고 희뿌연 안갯속에 잠기고 있었다. 나의 높은 해상도는 어머니의 시력을 양분 삼아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내가 처음 미용을 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이례적으로 강하게 반대했다. 평소 내 선택을 묵묵히 지지해 주던 분이었지만, 가위를 쥐겠다는 말 앞에서는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 굳이 힘든 길을 가려고 하니." 그 말은 당신이 평생을 버텨온 좁은 타일 바닥 위에서의 노동을, 자식만큼은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꿈을 꿀 수 있는지 찾지 못했던 나는 결국 어머니와 같은 길을 택했다. 미용사로 일하던 때, 어머니는 걱정 어린 응원을 보내주면서도 내가 거울 속에서 겪는 소모를 지켜보며 내내 속상해했다. 당신의 낡은 안경은 내가 걷는 길의 고단함을 이미 수만 번 읽어낸 예언서였고, 나는 그 예언을 보지 못할 만큼 시력이 너무 좋았던 셈이다.


이제 어머니의 가위질은 시력이 아닌 기억과 촉감에 의지한다. 안경을 써도 머리카락이 잘 보이지 않아 '감'으로 머리를 자른다는 어머니의 고백을 들었을 때,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서글픔을 느꼈다. 돋보기에 가까운 안경을 써도 흐릿해진 초점. 그것은 숙련이라 부르기엔 시린, 시력을 지불하고 얻은 대가였다.


안경을 벗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어머니의 맨얼굴은 낯설었다. 안경테가 수십 년간 짓눌러온 콧등 위에는 깊은 외길 같은 흔적이 붉게 남았다. 안경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어머니의 쇠락이 그제야 투명하게 다가왔다. 내가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그 물건이 어머니에게 남긴 것은, 콧등 위의 깊은 자국과 마모된 나사뿐이었다.


최근 공모전에 투고했던 어머니의 생애를 담은 글을 보여드린 적이 있다.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나의 글이 어머니에게는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의 재가 되어 날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스마트폰 화면을 안경 너머로 뚫어지게 응시하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미용실의 소음이 잦아든 고요한 거실, 화면을 넘기는 손가락만 움직일 뿐이었다. 자신의 고단함이 드러난 글을 읽으면서도 어머니는 그저 감정을 삼켰다. 긴 침묵 끝에 어머니가 나직하게 내뱉은 말은 짧았다. "슬프네. 내 젊었을 때를 기억하게 한다."


그건 어떤 미사여구보다 무거운 찬사였다. 눈물로 씻어내지 못한 채 안경알에 잔금처럼 남은 세월들이 그 한마디에 고여 있었다. 어머니에게 내 글은 문학이 아니라, 자신이 외면하고 싶었던 거친 삶의 기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여전히 내가 연재하는 글을 꼬박꼬박 챙겨보며 "잘하고 있다"는 응원을 보낸다. 문장을 써 내려가는 지금도 어머니는 여전히 나의 내일을 걱정한다. 기분은 어떤지, 밥은 먹었는지 묻는 일상적인 안부들.


나는 여전히 안경을 쓰지 않는다. 내 시야가 이토록 선명하고 투명한 것은, 어머니가 안경 너머로 평생을 바쳐 낡아준 덕분이라는 것을 이제야 감각한다. 한때는 미용사라는 같은 길 위에 서 있었으나, 이제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을 응시한다. 당신은 여전히 나를 향해 서 있고, 나는 당신이 열어둔 그 길을 따라 자꾸만 더 먼 바깥으로 걸어 나간다. 어린 날의 무지한 동경은 이제 갚지 못할 부채감이 되어 내 눈가에 머문다.

이전 17화더 이상 작아질 곳 없는 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