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감정은 항상 제때 도착하지 않는다.

by 김민경



세상은 때로 예고도 없이 무례하다.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든 차는 내 몸을 아슬하게 비껴갔다. 아스팔트 위에는 점점 작아지는 엔진소리만 남았다. 분명 내가 치일 수도 있는 순간이었으나, 나는 그 자리에 유령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마땅히 분노가 치밀어야 했다. 창문을 두드려 항의하거나, 멀어지는 차 뒷모습을 향해 소리라도 질러야 했다. 하지만 그때 내 몸이 선택한 것은 분노가 아니라 일시 정지였다.


우리는 흔히 감정이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반응이라고 믿지만, 사실 감정은 아주 느리고 신중하다. 특히나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 앞을 가로막을 때, 감정은 제 자리를 양보하고 뒤로 물러난다. 찰나의 순간, 뇌는 분노라는 감정을 처리할 힘을 끌어모아 ‘생존’이라는 본능에 쏟아붓는다.


일단 살아야 화도 낼 수 있기에, 마음은 분노를 잠시 숨겨두고 몸을 피신시키는 데 전력을 다한다. 분노가 제때 도착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잠시 보류된 셈이다. 뒤늦은 화는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을 때야 비로소 도착해 나를 흔들었다. 왜 그때 아무 말도 못 했을까. 왜 바보처럼 가만히 서 있었을까. 뒤늦게 고개를 든 분노는 갈 곳을 잃고 애꿎은 나 자신을 찔러댔다.


이러한 감정의 시차는 가장 소중한 관계 안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본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늘 습관적으로 마음을 가다듬는다. 현관문을 열고 가족들의 다정한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내 안의 우울은 조용히 숨을 죽인다. 우울과 무기력이라는 그림자가 시시때때로 의지와 상관없이 차오를 때도 있지만, 나는 그 감정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침범하기를 원치 않았다.


가족들에게 내 아픔을 숨기는 것은 결코 그들을 속이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나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얼굴에 무력한 걱정이 서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내가 무너진 모습을 보였을 때, 자신들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안절부절못하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내게도 아픈 일이었다. 그들의 다정한 하루가 나에 대한 걱정으로 채워지는 것은 바라지 않기에, 나는 기꺼이 내 감정을 잠시 뒤로 미뤄둔다.


요즘 어떻냐는 안부에 잘 지내고 있다고 답하는 찰나, 내 안의 소란함과 겉으로 드러나는 평온함 사이에는 거대한 시차가 발생한다. 이 시차는 사랑하기에 감수하는 인내다. 누군가의 평화를 위해 내 아픔을 잠시 미뤄두는 것, 그것이 내가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본집에 머무는 시간 동안 나는 평화로운 풍경의 일부가 되려 애쓴다. 마음 한구석에선 여전히 파도가 치고 있지만, 가족들과 나누는 평온한 대화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나를 지우고 가족들에게로 쏟아지는 방향으로 마음을 쓰다 보면, 정말 우울감이 잊히는 찰나의 순간들이 찾아온다.


함께 웃고 떠들며 음식 냄새가 밴 공기를 들이마시다 보면, 내가 아픈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잠시 잊게 된다. 그 온기가 너무 선명해서, 사실 내가 아프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찰나의 행복은 서울로 돌아온 뒤 더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나를 덮친다. 가족들의 다정함과 자취방의 적막함 사이에서 발생하는 아득한 격차. 가족들과 웃으며 보냈던 그 시간들이 빛나면 빛날수록, 홀로 남겨진 방의 어둠은 더 짙게 깔린다. 방금까지 존재했던 그 따스함이 가짜가 아니었음을 알기에, 다시 혼자가 된 현실은 더 잔인하게 다가온다.


그 격차를 견디지 못해 우울이 뒤늦게 터져 나올 때면, 나는 본집에서 미뤄두었던 눈물보다 더 무거운 슬픔을 쏟아낸다. 지연된 감정들은 그 시차만큼의 무게를 더해 나를 흔든다.


그렇다면 나는 왜 시차를 감수하면서까지 감정을 미뤄두었던 것일까. 그것은 내 마음이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감정은 무뎌서 늦게 오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관계와 상황이 너무 중요할 때 스스로 한 발 물러서기도 한다.


우리가 제때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시의 나에게 ‘느끼는 일’보다 ‘지켜내는 일’이 더 절실했기 때문이다. 가족의 무력감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억눌렀던 우울은 그 시간을 무사히 지나가기 위해 내 마음이 선택한 방식이었다. 결국 지연된 감정들은 버려진 것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온전히 쏟아내도 괜찮을 만큼 안전해질 때까지, 마음 깊은 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의 하루를 지켜내는 것이 나에게 더 간절했다는 것을, 내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횡단보도 위에서 침묵했던 분노는 그 순간의 공포를 견뎌낸 나를 대신해 뒤늦게 터져 나온 함성이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내뱉지 못했던 말들이 시간이 흘러 내 안에서 문장이 되고 소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서울의 방에서 쏟아지는 눈물 또한 마찬가지다. 가족들 앞에서 웃어야 했던 나를 대신해 마음껏 울어주는 뒤늦은 배려다. 감정은 엉뚱한 곳에 떨어진 배송 사고가 아니라, 내가 가장 솔직해질 수 있고 안전하게 무너질 수 있는 시간에 도착한 신호다.


결국 감정에도 각자의 도착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때로 상황에 밀려 늦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미뤄지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기꺼이 감정을 유예하며 버텼던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이제야 이 마음들이 터져 나올 수 있는 순간을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왜 그때는 아무 말도 못 했을까” 혹은 “왜 이제야 이러는 걸까”라며 과거의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다. 늦게 도착한 감정에게 죄를 묻는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해 감정을 미뤄두었던 내 마음의 선택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


대신 그 시차를 인정하고, 그때의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감정을 미뤄두었던 만큼, 그것을 다시 마주하고 흘려보내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마음이 상처를 처리해 내는 속도는 저마다 다르며, 그것은 억지로 재촉한다고 해서 빨라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감정은 남들보다 조금 늦게 흐르더라도, 결코 목적지를 잃지 않고 나에게 도착하고 있었다. 내가 가족을 위해 미뤄두었던 그 모든 마음은, 가장 안전한 순간에 비로소 나답게 울 수 있도록 나를 이끌고 있었다. 이제 나는 길을 돌아 뒤늦게 도착한 그 마음들을, 더 이상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받아들인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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