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서 들려오는 낮은 말소리에 문득 고개를 든다. 어머니와 이혼한 뒤 꽤 오랜 시간을 돌아 다시 우리 집의 공기를 채우게 된 ‘아버지’. 이제는 ‘새아버지’라는 서먹한 단어보다 ‘내 아버지’라는 실체가 더 어울리는 남자는, 요즘 우리 가족의 모든 일을 자신의 일처럼 도맡아 한다. 어머니의 지친 퇴근길에 함께 저녁을 먹고, 언니와 나의 사소한 고충까지 망설임 없이 몸을 움직여 해결한다. 그의 행동은 특별한 사건이라기보다 일상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게 반복되고, 그 반복 속에서 우리 삶은 조금씩 안정된 형태를 되찾아간다. 그가 우리 삶의 균열을 매우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쏟아붓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속엔 차마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파동이 일렁인다.
진실에 가까운 마음은 언제나 여러 마음이 지독하게 얽혀 있는 복합적인 상태다. 특히 혈연이라는 연결조차 없음에도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내어주는 이의 헌신을 마주할 때, 감정은 더욱 단순해질 수 없다. 안도와 죄책감, 다행과 부끄러움, 고마움과 불편함이 동시에 같은 자리에 존재한다. 하나의 감정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오히려 사라져 버리는 층위들이 분명히 있다. 그 복잡한 결을 한꺼번에 감당하는 경험 속에서 나는 비로소 인간이라는 존재의 입체적인 무게를 실감한다.
지금의 이 평온함이 머리가 울릴 정도로 달콤한 이유는, 그가 없었던 시절의 공기가 너무나도 차갑고 막막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곁에 없던 시절, 우리 집은 늘 기댈 곳 없는 위태로운 섬 같았다. 어머니는 홀로 생계를 책임지느라 늘 고단해하셨고, 그 무게를 나누어 짊어질 누군가는 없었다. 가게에 무언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어머니는 결국 형부에게 부탁을 하며 손을 빌려야만 했다. 여자들끼리 버텨내던 그 시간은, 단순히 외로운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해 긴장해야 하는 피로함의 연속이었다.
그가 돌아온 뒤의 풍경은 그래서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감당했어야 할 무게, 혹은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떠안아야 한다고 믿었던 책임들을 누군가가 대신 지고 있다는 사실은 익숙해지기 어려운 종류의 안락함이다. 서울에서 혼자 지내는 나를 위해 그는 기꺼이 먼 길을 달려와 나를 데리러 오고, 다시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수고를 반복한다. 차 안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눌 때, 이제는 기댈 곳이 생겼구나 라는 본능적인 안식을 느낀다. 거친 파도를 지나온 배가 처음으로 잔잔한 항구에 닿았을 때처럼, 몸의 긴장이 풀리는 동시에 낯선 정적이 찾아왔다.
이 안도감은 단순히 편안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를 위해 기꺼이 방패가 되어줄 존재가 곁에 있다는 든든함, 그리고 자식으로서 어머니를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아이처럼 기댈 수 있게 된 본능적인 안도인 셈이다.
하지만 이 평온함이 깊어질수록 투명한 수면 아래에서 어두운 심해의 감정이 고개를 든다. 어머니가 아플 때면 자연스럽게 병원을 오가고, 전구를 갈거나 수도를 손보는 사소한 일들까지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그 감정은 더 또렷해진다. 그것이 단순한 도움을 넘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 전체를 책임지는 방식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서서히 깨달았다.
내가 했어야 할 일을 아버지가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자문은 스스로를 향한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그가 쏟는 생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나의 편안함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피를 나누지 않은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호의를 나는 어떤 자격으로 누리고 있는 걸까. 그의 고생과 희생이 담긴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무거워졌다.
왜 나는 그에게 순수한 고마움만을 느끼지 못하고 끊임없이 죄책감의 가장자리를 맴도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이 이미 단순한 ‘남’의 범주를 벗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가까워진 관계 속에서 호의는 더 이상 호의로만 존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책임의 감각과 겹쳐지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우리의 삶 속에서 ‘외부의 도움’이 아니라 ‘내부의 구성원’이 되어버렸고, 그 순간부터 감정은 단순한 교환이 아니라 얽혀 있는 구조가 된다.
그가 베푼 정성이 고맙고, 그가 쏟아낸 시간이 소중하며, 그의 고단함이 나의 것처럼 느껴지기에 발생하는 감정이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미안해할 이유도, 그를 걱정하며 자책할 이유도 없다.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곧 아버지가 내 삶에 깊숙한 곳으로 들어왔고, 그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아끼고 있다는 고백일 것이다. 이 죄책감조차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우리 가족은 세상이 말하는 이른바 ‘정상’의 범주에서 비껴 나 있는지도 모른다. 친부와의 이별 후에 만난 ‘새아버지’, 그리고 그와 다시 남남이 되었다가 결국 또 한 번 가족으로 마주하게 된 기묘한 인연. 누군가는 우리를 결핍이 많은 가족이라 말할 것이고 어딘가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특이한 형태라고 수군거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상적인 가족’은 무엇이고, ‘이상한 가족’은 무엇일까? 겉보기에 멀쩡한 옷을 입은 가족들도 저마다의 주머니 안에는 말 못 할 흉터와 결핍을 한 움큼식 쥐고 살기 마련이다.
가족은,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 완벽한 합을 이루는 집단이 아니다. 서로의 못난 단점과 결함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그 빈틈을 기꺼이 자신의 정성으로 메워주려 애쓰는 마음들의 집합이다. 아버지가 우리를 선택했듯, 우리도 그의 서툰 시간들을 선택했다. 각자의 부족함을 존중하고 결핍을 온기로 덮어줄 때, 비로소 우리는 서류상의 관계를 넘어선 관계가 되었다.
감정의 순도가 100% 일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내 마음속에 이기적인 안도와 이타적인 죄책감이 뒤섞여 있다고 해서 스스로를 자책할 필요는 없다. 그 여러 마음이 부딪히며 내는 소음이야 말로, 우리가 여전히 서로를 의식하고 배려하며 살아있는 존재라는 증거다. 안도만 있다면 그것은 이용하는 관계일 뿐이고, 죄책감만 있다면 그것은 거리감 있는 부채일 뿐이다. 하지만 안도와 죄책감이 반반씩 섞여 마음속에서 진동을 일으킬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삶이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음을 체감한다.
나는 오늘도 아버지의 헌신 앞에서 비겁하게 안도하고, 또 무겁게 미안해한다. 그리고 이 모순된 소용돌이 속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섞여 있기에 더 깊고, 완전하지 않기에 더 진짜에 가까운 이 감정의 형태가 내가 찾던 ‘가족’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