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반려견과 함께 나서는 산책길에는 정해진 시간에 마주치는 풍경이 있다. 골목의 모퉁이를 돌 때쯤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슥슥, 빗자루 소리. 아침의 길목을 비워내는 한 미화원이다. 그는 반려견을 유달리 예뻐한다. 투박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작된 대화는, 늘 내가 예상치 못한 사적인 안부로 흐르곤 한다.
“나 사실 몇 년 전에 이혼했어요. 혼자 사니까 집이 참 적막해.”
“아들이 하나 있는데 연락이 잘 안 되네. 다 키워놔 봐야 소용없어.”
그는 묻지도 않는 내밀한 가정사를 공기 속에 툭툭 던져놓는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기엔 그가 내어놓은 문장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하지만 가만히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의 안색 위로 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말을 붙이고 싶은 다정함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마음속에 고인 상처가 가득 차서 어디로든 흘러넘쳐 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의 절박함 같기도 했다. 그는 나의 존재를 빌려 자신의 삶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뱉어내야만 비로소 확인받고, 안심에 닿을 수 있다는 듯이.
내 곁에도 그 미화원처럼 다정하고 수다스러운 동료들이 있었다. 일터의 고단함을 술 한 잔에 녹여내며, 그들은 자기들의 연애 고민부터 사소한 콤플렉스까지 아낌없이 내 술잔 위에 쏟아부었다. “민경 씨는 어때? 민경 씨 이야기도 좀 해봐.” 그들은 기꺼이 나를 위한 자리를 비워두고 내 입술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목구멍에는 늘 커다란 돌덩이가 걸려 있었다.
그때의 나도 나를 설명하고 싶었다. 그들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하고 싶었고, 내 마음속에 고여 있는 생각들을 꺼내 그들의 수다에 보태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을 떼려는 찰나마다 수만 가지 생각이 나를 가로막았다. 누구의 편도 들고 싶지 않았던 나의 중립이 혹여나 말 한마디에 무너질까 봐 두려웠고, 내 진심이 어설픈 단어로 번역되어 오해를 받을까 겁이 났다. 나를 설명해서 얻는 안심보다, 나를 숨김으로써 진실을 지키는 외로운 안전함을 택했다.
그때 나는 왜 그토록 입을 닫았을까. 나를 오해받게 내버려 두는 것이 차라리 구구절절해지는 것보다 낫다고 믿었던 걸까.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관계는 서서히 멀어졌다. 그렇게 나는 침묵이라는 요새 안으로 숨어버렸다. 오해받지 않으려다 아무것도 이해받지 못하는 쪽을 선택한 셈이다.
골목의 미화원과 미용실의 나는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서로 다른 줄기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쏟아지는 설명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아야만 비로소 답답함이 풀리는 그만의 방식이었고, 나의 무거운 침묵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온전히 지켜내려는 나의 방식이었다.
그는 타인의 귀를 빌려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려 했고, 나는 나의 입을 막아 내 진심이 서툰 말들에 섞여 흐려지지 않기를 바랐다. 방식은 정반대였지만, 그 이면에는 나라는 존재가 타인에게 어떻게 읽히고 있는가에 대한 불안이 흐르고 있었다. 타인의 이해가 없어도 괜찮다는 나의 고집스러운 자존심이나, 낯선 이의 걸음을 멈춰 세워서라도 이야기를 쏟아내야 했던 그의 외로움이나, 결국은 나라는 존재가 잊히거나 오해받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마음의 다른 얼굴이었을 뿐이다.
이제는 아침 길목에서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다. 그가 내뱉는 문장들이 그를 안심하게 하는지, 아니면 그저 공허한 혼잣말에 불과한지 나는 가늠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누군가는 뱉어내야 살고, 누군가는 삼켜야 사는 각자의 방식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탱하며 매일을 건너가고 있다.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때 동료들 앞에서 나를 설명했어야 옳았던 걸까. 침묵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외롭게 만들었고, 설명은 나를 관계 속에 두었겠지만 나를 공허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구구절절 자신을 꺼내놓는 이유는 어쩌면 아주 단순한 곳에 있을지 모른다. 내 몸을 통과해 나온 목소리가 공기를 흔들고, 그 파동이 다시 나의 귓바퀴를 타고 안으로 스며들 때 느껴지는 기묘한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내 안에서 제멋대로 엉켜 있던 마음의 실타래가 '언어'라는 질서를 입고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비로소 나는 내 고통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형체 없던 불안이 내가 다스릴 수 있는 실체가 되어 눈앞에 놓이는 것이다. 결국 설명이란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기 전에, 떨리는 내 목소리로 내 안의 소란을 잠재우는 가장 본능적인 치유의 의식이었음을, 나는 미화원의 굽은 등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그러니 그때 나를 설명하지 않았던 것도, 지금 그가 내밀한 사연을 쏟아내는 것도 틀린 답은 아니었다. 침묵은 나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성벽이었고, 설명은 그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놓은 가느다란 밧줄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이라는 문장을 써 내려가고 있으며, 때로는 그 문장 사이에 쉼표를 찍고 때로는 마침표를 찍으며 나아간다.
결국 "나는 왜 나를 설명해야 안심할까"라는 질문의 끝에는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욕구보다 나 스스로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놓여 있다. 밖으로 뱉은 말이 타인의 귓가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진다 해도 상관없다. 그 소리를 내 귀로 직접 확인하는 동안, 나는 내가 내 삶의 주인임을 비로소 실감한다.
오늘도 미화원의 빗자루 소리는 아침의 정적을 깨우고, 그의 목소리는 골목의 공기를 메운다. 나는 이제 그의 이야기를 부담스러운 고백이 아닌, 스스로를 돌보는 위로로 듣는다. 그리고 나 또한 이제는 안다. 입술을 닫고 진실을 지키는 일만큼이나, 때로는 어설픈 단어에 나를 실어 보내는 용기가 나를 더 넓은 세상과 연결해 준다는 것을.
설명과 침묵, 그 어느 쪽을 택하든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오늘도 묵묵히 걷는 발걸음과 이따금 건네는 서툰 안부 사이에서, 나라는 존재가 안심할 수 있는 자리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