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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혁 May 28. 2024

끊지 못하는 사람들

단번에 자를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없다

한가로운 주말 오후를 보내기 위해 번화가의 북적한 카페가 아닌 인적이 드문 조용하고 아늑한 카페를 찾았다. 통나무로 인테리어가 되어있는 공간의 나무 향과 커피 향의 조화는 평온과 아늑함의 극치를 가져다주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햇살이 살짝 들어오는 창가로 자리를 잡았다. 듬성듬성 앉아 있는 두어 팀의 다른 손님들도 단골인 듯 이 공간을 꽤나 느긋하고 여유롭게 이용하는 것 같았다. 평온과 여유를 즐기기 위해 방문한 곳이라 특별히 작업할 도구들은 준비해오지 않았다. 급하게 메모할 것이 있으면 휴대폰이 있으니 걱정할 일은 없었다.


그렇게 한 이삼십 분을 평온에 젖어있었는데 예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여자 손님 두 명이 카페에 들어왔다. 그들은 이미 카페 문을 열 때부터 목소리가 상기돼 있었고 그중 한 명은 흐느끼기까지 했다. 순간 직감을 했다. “나의 평온이 깨지는구나. 하루를 망쳤구나. 마시던 커피를 후딱 마시고 나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몇 초 만에 머리에 들이찼다. 그들은 커피 두 잔을 재빠르게 주문하고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대화를 진행 중이었다. 꽤나 큰 목청과 상기된 대화는 카페가 아닌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마시던 커피를 빨리 마시고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그들의 대화는 원하지 않았는데도 귀에 잘 들어왔다. 대화의 주제는 남자친구와 헤어진 친구에게 다른 친구가 위로를 해주고 있었다. 헤어진 여자의 한탄은 멈추지 않는 흐느낌이 섞여 있었고, 여자는 그 한탄을 친구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헤어진 여자: 내가 자기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나를 차? 3년 동안 좋았던 추억은 다 거짓이었던 거야? 정말 너무 서럽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사랑한 척만 했던 거였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위로하는 여자: 거봐, 진작에 헤어지라고 했잖아. 그 사람은 너를 이용한 거라니까. 너 필요할 때만 찾고 정작 네가 그를 원할 때 제대로 곁에 있어 준 적 있어? 내가 늘 말했잖아. 그는 널 사랑하지 않으니까 빨리 헤어지라고.

헤어진 여자: 그래도 나한테 잘해줄 땐 진짜 잘했단 말이야. 나쁜 놈인 건 맞지만 그래도 잘 맞고 좋았던 것도 종종 있었어.

위로하는 여자: 아니라니까. 다 쇼라니까. 너 이용하려고 잘하는 척한 거야. 3년 동안 좋았던 날이 며칠이나 되는데? 대체 뭘 잘해준 건데? 그놈이 그럴 때마다 내가 헤어지라고 몇 번을 말했어. 질질 끄니까 그놈이 널 찼잖아. 난 그놈이 널 버릴 줄 알았어. 이미 끝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왜 아직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그놈이 뭐 대단하다고 잊지를 못하는데. 충분히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다고 몇 번을 말해. 전에도 너 좋다고 하는 사람 있으니까 그놈이랑 끝내라고 내가 계속 말했잖아. 좋은 사람과의 시작이 기다리고 있는데 왜 그놈한테 미련을 못 버려? 대체 왜?  



둘의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이 한 번쯤은 겪을만한 흔한 연인 간의 일이었다.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모두가 고민했었고 갈등했던 일이다. 사회와 과학이 발전하는 앞으로의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큰 변화는 없을 고민이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만남은 더욱 짧게 느껴지고 멈춰버린 것 같은 이별의 순간과 과정은 끊을 수 없는 괴로움의 지옥이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연인들의 이별은 언제나 눈물 한 바가지를 들이부어도 쉽게 끊어내지 못한다. 대부분의 이유는 비슷하다. 정이다. 그동안의 시간, 누군가와의 추억, 좋았던 순간들,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 영원인 것처럼 자신의 삶에 박제되듯 자리한다. 좋았던 것을 잃는다는 두려움에 세상은 무너지고 자신의 존재마저 희미함을 느낀다. 실은 좋았던 순간보다 나쁘고 불편했던 순간이 더 많았을 것인데도 대부분의 끝자락에서는 몇 안 되는 좋았던 기억만이 머리와 가슴을 부풀려서 쉽게 끊지를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아닌 것은 어떻게든 끝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롭고 힘든 아픔이 지속될 걸 알면서 끝이라는 마지막을 애처롭게 붙잡고 있다.


몸과 마음이 괴롭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성숙된 자아를 찾은 듯해도 만남과 이별은 언제나 똑같고 비슷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고 더욱 성숙한 만남이나 이별을 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기에 끊임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평생을 반복한다. 비단 이성 간의 관계뿐만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는 평생 언제나 비슷한 굴레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누구도 자신을 위로하거나 해결해 줄 순 없다

관계를 잘 끊지 못하는 건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과도 같다. 삶의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흐르게 할 순 없다. 관계를 잘 못 끊는다는 건 결코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과 현실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그 횟수와 빈도가 높으면 삶에 문제가 많이 생긴다. 그런 사람 대부분은 착하고 선한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나쁜 사람이라서 잘 끊는 것도 아니다. 좋고 나쁨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과도 관련이 있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수단으로서 이기심이나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조금씩은 갖추어야 한다.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자신을 둘러싼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다는 현실을 인지해야 한다. 끊지 못하는 사람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위로와 해답을 건넨다. 특별한 언행도 아니다. 그저 한마디를 건넨다.


“뭘 그리 생각하고 고민해. 그냥 말아. 연락하지 마. 차단해 버려. 그러면 될 것을 왜 그리 질질 끌고 그래.”


몰라서 안 하고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몸과 정신이 하나가 될 수 없는 상태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후회스러운 삶의 찌꺼기

배가 고픈데 배가 나와 있는 사람들이 있다. 객관적인 사실로 따져보자면 운동 부족과 영양 과잉 및 불균형으로 이뤄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인생이란 건 원인과 결과라는 정확한 숫자놀음으로만 이루어지진 않는다. 생각보다 우리 삶은 나온 배를 의식하면서도, 끊임없이 과잉 섭취를 하는 경우가 일상에 만연하다.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아무도 이상하게 보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타인보다 조금 더 과하다 싶으면 한두 마디 정도는 해주겠지만 도토리 키재기고 도긴개긴이다. 알면서 멈추지 않고 끊지 못하게 된 자연스러운 일상을 의지 부족이라고만 단정 지을 순 없다. 생각보다 삶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삶에는 분명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서 어떠한 것을 택해도 갖가지 후회가 즐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울분을 토하며 어쩔 수 없다는 표현을 해보지만 분명 덜한 것은 존재한다. 어쩌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을 텐데 그 굴레를 빠져나오지 못한다. 처음에 배가 고팠을 때 배는 홀쭉한 상태였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배가 불룩하게 나와 버리거나 미친 듯이 먹어도 배부름을 못 느끼는 나날이 반복되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순간에 스스로를 놓아버려서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지속적으로 들이부었을 가능성이 높다. 방치하고 신경 쓰지 않았던 과거의 순간들이 현재의 나온 배다. 어느 순간 나온 배는 배가 고픈 것의 유무와 상관없이 늘 나와 있다. 그리곤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는 건 삶의 곳곳에 고장이 났었던 자신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해 둔 결과이다. 뒤늦게라도 수습하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후회스러운 삶의 찌꺼기가 자신의 인생 전반을 지배하지 않게 말이다.



끊을 수 없다면 되도록 멀리하자

판단과 결정은 나은 삶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유부단하고 어물쩍거리는 모습은 그 누가 봐도 삶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누군가는 이런 시행착오조차 나은 삶을 위한 과정이라고 하지만 비슷한 경우를 반복하는 건 그냥 바보이다. 이것은 인생의 시간 낭비일 뿐이다. 단순히 삶을 낭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다가올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불운을 떠안는 것이다. 


시대가 변할수록 주관과 소신이 뚜렷한 젊은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에게 부정으로 미치는 영향을 단번에 끊는다는 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숨 쉬고 살아가는 세상과 관계는 가는 실 하나로 연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닌 건 끊어야 한다.”라는 명확한 결과론보다는 “아닌 건 멀리해야 한다.”라는 점진적으로 삶을 이끌어나가야 한다. 끊으면 아프기에 아무것도 볼 수 없고 할 수도 없다. 단번에 잘린 것들의 단면은 그저 고통만이 수반되지만 멀어진다는 건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해 준다. 이것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타인에게 고통도 미치지 않는다.


시작과 끝은 비슷해야 하는데 늘 갭 차이가 크다. 긍정의 기쁨은 터지는 폭죽같이 반짝이지만 부정의 아픔은 타버린 재처럼 그 자리에 오래 남겨진다. 잘 끊는다는 건 아닌 것만 잘 떼어내고 쌓아놓은 것을 되도록 잃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인생에서 쌓아 올린 수많은 것들이 어떤 하나로 인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큼의 큰 불행은 없다. 어느 곳이 아프면 그 아픈 곳에 맞는 병원에 가서 그 부위를 낫게 해주는 약을 먹고 치료를 해야 한다. 아픈 부위만 끊을 수 있는 병원을 찾는 방법이나 아픈 부위에 잘 드는 약을 파는 곳을 찾아야 한다. 쓸데없는 엄한 곳에서 돈 낭비, 시간 낭비, 감정과 마음 낭비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나은 인생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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