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장애와 마음의 장애를 동시에 얻다

시각장애와 말더듬증이 삶에 스며들다

by 이민혁

죽기보다 싫었던 마음의 장애

아주 오래전 일이다. 짜장면이 먹고 싶어서 중국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왜냐하면 “짜장면 하나 주세요.”라는 말을 못 할까 봐 두려워서였다. 주문을 받으러 종업원이 다가올 때쯤 그 두려움은 약간의 현기증을 동반한 채 현실이 됐다. 결국 “짜장면 하나 주세요.”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상기된 얼굴로 중국집을 뛰쳐나왔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심하게 뛰는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 쌓였던 설움이 터졌다. 요동치는 입을 틀어막았는데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가까운 공원으로 뛰어갔다. 주위에 사람들이 없는 걸 확인하자마자 흐느낌은 육성으로 터졌고 주저앉아 소리 내서 울었다. 스스로 가슴을 치면서 나에게 말했다.


“이 병신 새끼야 나가 죽어라. 왜 사냐, 왜 살아!…”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근래에도 종종 그날의 꿈을 꾸곤 한다. 그랬다. 나는 말더듬이다. 아니, 말더듬이였다. 지금은 일상에서 말을 더듬는 것으로 인해 정신적이나 물질적으로 피해 보는 일은 없다. 하지만 한창때인 10대와 20대의 삶은 하루하루가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찼던 때였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원하는 것, 표현하고픈 생각, 사람들과의 소통 등에서 대화로 인해 극심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아울러 늘 내 밥그릇도 챙겨 먹지 못했던 바보 같은 한때였다. 그러나 내가 이런 말더듬이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가족 외엔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사회에서 어울리는 사람들에게 나의 불편한 모습을 어떻게든 감추려고 애쓰며 살았다. 타인이 내가 말더듬이란 사실을 아는 것은 진짜 죽기보다 싫은 삶이었다. 관계에 있어서 할 말도 못 하고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제어해 가며 사는 모습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런 나의 콤플렉스를 숨기고 사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삶이었다. 콤플렉스를 숨기기 위해 부단히 장점을 부각하며 외향적인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오해를 받았고, 그 때문에 얻은 것도 많고 잃은 것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말더듬증을 고치려고 많은 것들을 해봤지만 돈만 많이 쓰고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 그땐 전화 공포증(Call Phobia) 증상도 심해서 휴대폰을 일부러 집에 놔두고 다닌 적도 많았다. 이러한 습관은 지금도 이어져서 목소리 대화보다는 문자 대화가 편하고 익숙하다. 그러다 30대에 접어들어서 알게 되었다.

나의 말더듬증은 마음의 병이었다.

원인을 알게 되자, 말더듬증은 자연스럽게 현저히 줄어들었다. 여전히 말을 할 때 특정 자음으로 시작되는 단어가 있으면 살짝 머뭇거리긴 하지만 예전처럼 불안했던 마음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글을 쓰고 첫 책을 출간할 당시에 큰 고민이 생겼다. 크고 작은 자리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첫인사로 내 이름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작은 두려움이 가시질 않았다. 여전히 입안을 맴도는 불편한 특정 자음이 내 이름 본명 세 글자에 모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 시작된 제2의 삶은 내가 갖고 싶은 이름인 ‘이민혁’이라는 필명을 쓰고자 마음먹었다.


겉으로 티 나지 않는 장애인

나에겐 흐릿해진 말더듬이라는 마음의 병과 함께 평생을 함께하는 육체적인 불편함도 있다. 나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등록된 ‘시각장애인’이다. 학창 시절 때 후천적으로 어느 날 갑자기 눈이 안 보이기 시작했다. 병명은 ‘망막박리’였다.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수술을 3번이나 했지만 전부 실패했다. 그로 인해 병원에 1년 동안 입원을 했었고 학교도 1년을 쉬었다. 그래서 내 동기들은 늘 나보다 한 학년 위였다. 친구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던 날 나는 고3이었다. 정말이지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에 공부는 물론이고 아무것도 하기 싫을뿐더러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악몽 같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고, 언제나 교복을 벗고 학교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악몽이었는지 30대 초반까지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가는 꿈을 꾸곤 했다. 깨어나면 베개는 늘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안 보이게 된 눈을 살려내진 못했지만 그래도 정말 다행인 건 시력을 잃은 눈이 돌아가지 않아서 ‘사시’는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눈이 안 보이는 장애인인 줄 아무도 모른다.


한창때인 10대와 20대 때엔 공간감이 현저히 떨어져서 생활이 약간 불편했다. 물건을 헛짚는 실수는 수도 없이 하는 일상이었다. 그로 인해 일상에서 타인에게 절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물건을 던지지 말라고 한다. 잡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바로 코 앞에서 던지는 걸 왜 못 잡는지 장애를 드러내면서까지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넘기는 일이 많았다. 이런 사소한 불편함과 함께 또 한 가지 불편함도 있는데, 그건 한쪽 눈으로만 생활하는 게 눈의 피로를 더욱 가중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눈을 감고 있는 적이 많은데 회사 생활을 할 땐 오해도 많이 받았다. 이 모든 일들이 나에겐 그저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야 하는 평범한 일상일 뿐이다.


한쪽 눈이 자연적으로 실명된 것에 대해 처음엔 이유를 몰랐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분명한 원인을 알 수 있었다. 학창 시절에 당했던 ‘학교폭력’으로 인한 후유증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학교폭력이 오늘날처럼 이렇게 사회적인 범죄와 문제로까지 인식되기 전이었다. 애들끼리 놀다 싸우면서 때리기도 하고 맞기도 하는 것이 통용됐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일방적으로 맞기만 했다. 나를 때렸던 아이들의 이름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지만 그저 한때의 기억으로 묻고 살아갈 뿐이다.


학교폭력을 겪은 사춘기로 인해 내적인 장애와 외적인 장애를 동시에 짊어지고 성인이 된 나는 삶의 피해자이자 낙오자로 갇혀 살았다. 마냥 좋고 아름다워야 할 시절에 불편한 나무가 내 안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성하게 자랐다. 하늘은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는지 원망스럽기만 했다. 태어난 걸 부정하며 부모와 형제 그리고 사회의 모든 걸 외면하려 했던, 철없던 시기에 늘 바라던 건 ‘자유와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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