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교황의 성인 '성 프란치스코'의 마을
일곱 번째 도시는 아씨시(Assisi). 아씨시는 그곳에서의 이야기보다 가기까지의 이야기가 더 많다.
아씨시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건 연남동에서였다. 동진시장 옆에 있는 작은 파스타 가게 아씨시는 토스카나식 파스타를 파는 곳이다. 한 번은 가게가 쉬는 날에 찾아갔고 또 한 번은 사람이 꽉 차 있어 세 번째에야 겨우 맛을 본 그 파스타는 정말 내 스타일이었다. 메뉴판에는 '아씨시의 파스타는 토스카나식으로 만들어 소스가 적다'라고 적혀있었는데 당연하게도 나는 아씨시가 토스카나 지방의 도시인 줄 알았다. 그때부터 아씨시와 토스카나 주에 대한 약간의 로망을 가졌던 것 같다.
피렌체에서 묵었던 아파트에는 정말 친절한 직원이 많았다. 체크아웃을 할 때 다음엔 어느 도시로 가냐길래 아씨시로 간다길래 우리보다 더 기뻐하며 움브리아는 정말 아름답다며 부럽다고 했다. 아씨시는 움브리아 지방이었고 토스카나는 우리가 곧 떠날 피렌체가 있는 주였다..ㅎㅎ
이번 여행에서 아씨시를 가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낭만과 열정 사이>의 도시 피렌체에 가고 싶었고,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로마를 가야 했다. 그 사이에 있는 소도시를 구경하고 싶었는데 마침 지도에 약간의 로망을 품었지만 잠시 잊고 있던 아씨시가 눈에 띄었다. 검색해보니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라고 했다. 로망은 커졌고 아씨시에 꼭 가야 할 것만 같았다.
그 로망이 절정에 이른 건 아씨시의 한 수녀원에서 도미토리를 제공하고 이탈리아식 저녁을 먹을 수 있고, 한국인 수녀님이 계셔서 예약도 무척 쉽다는 정보를 알았을 때였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으니까 저렴하고 안전한 수녀원 도미토리로 숙소 걱정도 끝났고 게다가 이탈리아 전통 가정식 저녁이라니. 안 갈 이유가 없잖아!
델질리오 수녀원 도미토리는 숙박을 원하는 달부터 한 달 전에만 예약을 받았다. 7월에 아씨시에 갈 예정인 나는 연초부터 꼬박 몇 달을 기다려 6월 1일이 되자마자 메일을 보냈고, 수녀원의 도미토리와 저녁 식사를 예약할 수 있었다. 고즈넉한 중세의 성스러운 도시의 수녀원에서 잠을 자고 정갈한 전통 이탈리아식 저녁 식사라니, 생각만 해도 두근거렸다.
하지만 계획은 깨어지라고 있고 기대 역시 무너지라고 있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델질리오 수녀원에 가지 못했고 꿈꾸던 멋진 저녁 식사도 하지 못했다. 혼자 계획한 여행이었지만, 갑작스럽게 애인과 유럽에서 만나기로 했고, 프라하부터 아씨시를 지나 로마까지 동행하게 됐기 때문이다. 같이 다니게 돼서 좋았고 덕분에 잘츠부르크의 멘붕도 이겨낼 수 있었지만 아씨시의 델질리오 수녀원은 포기해야 했다. 수녀원 도미토리엔 남자는 묵을 수 없었고 2인실이나 가족실은 (당연하게도) 이미 예약이 꽉 차있었다.
애인과 함께 여행하는 것은 정말 기대되는 일이었지만, 와장창 무너진 내 기대.. 내 로망... 나의 아씨시...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해서 일정을 수정할 때는 쿨한 척 양보했지만, 당시 비행기를 예약하기 전인 애인이
"나 그냥 조금 일찍 돌아갈까? 피렌체까지만 같이 다니면 어때?"
라고 하는 바람에 버럭 화를 내버렸다. 야 내가 너 때문에 숙소도 여기저기 바꾸고 심지어 고대하고 기대하던 델질리오 도미토리까지 포기했는데, 뭐라고? 그때는 이미 수녀원 도미토리마저 예약이 꽉 차 있었다.... (폭발) 결국 원래 일정대로 로마까지 함께 하기로 했고, 다행히도 우린 여행 기간 내내 더는 싸우지 않았다.
이런저런 고난이 있었지만 결국 우린 함께 아씨시에 왔다. 사람 많고 더운 피렌체에서, 더 사람 많고 덥고 심지어 좁기까지 한 레지오날레를 타고 두 시간여를 달려 아씨시 역에 내린 순간, 나는 내가 여길 좋아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Assisi라고 쓰인 기차역의 글씨체도 마음에 들었고 인적 드문 기차역도 좋았다. 아씨시까지 가는 버스표를 파는 작은 매점도 너무 귀여웠다. 기차역에서 버스를 타고 십오 분 정도 달렸다. 버스는 넓은 해바라기 밭을 가로질러 한참을 달렸다. 구불구불 산을 둘러 올라가 산 위의 작은 마을 아씨시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델질리오 수녀원에 가지 못했지만, 이미 충분히 좋았다.
교황의 성인인 성 프란치스코의 유골이 있는 곳. 이탈리아 사람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긴다는 도시. 중세를 그대로 간직한 도시. 내가 사랑하는 멋진 우리 할머니가 천주교 신자여서 여기서 할머니 선물을 사드리고 싶었고 정말로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하얀 묵주를 사다 드렸다. 다녀와서 선물을 드리자 그저 묵주일 뿐인데 너무너무 좋아하셔서 괜히 눈물이 핑 돌았었지.
아씨시는 많은 사람들이 당일치기로 보고 넘어간다고 한다. 그래서 아씨시 기차역에는 한국어로 '짐 보관'이라고 쓰여있기까지 한다. 우리는 하루를 묵었고,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왔으니 딱 좋은 선택이었다.
작은 마을 아씨시엔 명성답게 예쁘고 성스러운 성당들이 있었고, 나는 신자가 아니었고 애인도 나일론 신자지만 조용히 들어가 마리아 그림을 보고 나왔다. 돌길과 돌 건물들, 유난히 많이 보이는 꽃들. 중세 영화 속을 걷는 듯한 느낌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돌벽 너머로 초록빛 움브리아가 보였고 난 정말 이 도시가 너무너무 좋았다.
초록빛과 황금빛의 움브리아, 아씨시. 왜 이곳이 성스러운 도시인지 알 것 같았다. 신성함과는 거리가 먼 나조차도 왠지 모르게 경건해졌다. 이탈리아에 가는 사람들에게 진심을 담아 추천하고 싶은 도시.
도시 곳곳은 정말 중세에 시간이 멈춘듯했다. 오래된 돌 벽도 그랬고 빨간 꽃으로 장식한 나무 문도 그랬고 이런 귀여운 푸줏간과 멋진 꽃나무도 그랬다. 순간순간을 전부 기억하고 싶어서 눈을 깜박였다.
멋진 등나무 줄기가 드리워진 식당에서 맛있는 봉골레를 먹었고 해가 지자 약간 쌀쌀해진 바람에 몸을 떨었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곳이 있다니,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델질리오 수녀원을 포기하고 새로 잡은 호텔도 상상 이상으로 멋졌고 호텔 매니저 안토니오도 시크한 표정으로 무척 다정하게 우리를 챙겨주었다. 매일 있다는 간식 타임엔 정말 집에서 만든 것 같은 진한 쨈 파이와 타르트들이 있었고, 우리는 연신 행복하다고 말했다.
지는 해가 도시 위로 쏟아질 것 같았던 저물녘, 우리는 아씨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아씨시와 저 멀리 들판을 한참 내려다보고 사진을 찍고, 길어진 그림자와 함께 내려왔다. 아씨시의 첫날 밤이자 마지막 밤.
하루뿐이었지만 아직도 그리운 아씨시, 언젠가 여기도 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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