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맞고 컸지만, 삐뚤어지지는 않았다

그림자를 찾는 시간

by 공작

그 시절엔 그랬다.


내 아랫입술 한쪽엔 희미한 흉터가 있다. 나는 세수를 하고 로션을 바르고,

파운데이션을 바를 때 거울 쪽으로 가까이 가서 입술 흉터가 얼마큼 없어졌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조금은 옅어졌을까?"흉터는 들여다봐도 그냥 흉터일 뿐이다.

아무리 문질러도

없어지진 않는다.

엄마 때문에 생긴 흉터다.


엄마는 자주 화를 냈다.
그 시절엔 누구나 그랬다고 하지만, 나에게 그건 여전히 두려운 기억이다.
엄마 말을 어기면 매가 날아왔고, 엄마 옆에 있는 것은 뭐든 매가 되었다.

빗자루의 플라스틱 대도 아팠지만,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파리채로 맞는 게 가장 아팠다.

훗날 대학 선배는 선배의 엄마한테 수돗가에서 고무호스로 맞았다고 해서, 거의 학대 수준으로 맞은 선배에게 많이 아팠겠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엄마도 너무 어린 엄마였던 것 같다.


한 번은 친구가 도로 근처에서 불량식품을 먹고 있어서, 나도 하나만 달라고 따라갔다. 어느샌가 동생이 나를 따라 나왔고
엄마가 “도로 근처엔 절대 가지 말라”라고 했던 말을 잊은 채였다.
그 일을 동생이 엄마에게 일렀다.

엄마는 도로가에서 차사고로 우리가 죽을 까봐 죽일 듯이 때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를 피해 달아난 담벼락 아래로 독자갈이 날아왔다. 엄마는 완전히 돌아있었다.
입술에서 피가 났다. 그 자리에 생긴 흉터는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엄마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그랬었나?” 하며 진짜 그 일이 없었던 듯 산다.


하지만 내 입술의 흉터는 그날을 기억한다.
이젠 나만 아는, 나를 증명하는 작은 흔적......


엄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시절, 엄마는 어린 동생들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시골집의 살림을 도맡았다.
심지어 일찍 부모를 잃은 조카들까지 돌봐야 했다.
밭일과 집안일, 아이들 세끼 밥까지 챙기던 그 시절에는 사랑보다 매가 더 빠른 빵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독해져야 했고, 그 독이 나에게 까지 닿았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았다.
그 매질을 피해 도망칠 곳이 있었으니까.

그곳은 할머니의 품이었다.

할머니가 발라주던 안티푸라민 냄새와 손의 온기가 아직도 내 기억 깊숙이 남아 있다.
할머니의 손길은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위로였다.


할머니가 서울로 가는 날은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고,
전주로 돌아오는 날은 다시 빛이 들어오는 듯했다.
할머니가 내 곁에 있을 때, 나는 조금은 안전했다.
매서운 세상 속에서도 사랑받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었다.


이제는 이해한다.


엄마의 매가 미움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는 걸.
그리고 그 지옥에서 나를 지켜준 건
할머니의 다정한 손이었다는 걸.


그 두 가지가 함께 있었기에,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상처와 위로,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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