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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하 Apr 28. 2023

이해되지만 아프다

엄마 나이가 되어 다시 어린 시절을 돌아본다.

 세상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곡을 하며 울고 있는 할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둘째 큰아버지를 잃은  슬픔의 노래는 가끔 온 방 안을 채웠다. 둘째 큰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할머니의 말대로 미남이었던 둘째 큰아버지는 할머니의 다섯 아들 사이에서 흑백사진을 뚫고 나올 만큼 유독 훤칠해 보였다. 후에 듣기로는 술 마시는 것을 좋아했고, 어느 날 잠을 자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엄마는 갑자기 돌아가신 큰아버지의 쌍둥이 언니들도 돌봐야 했다. 동생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 둘째 큰엄마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서울로 갔다. 걸핏하면 드나드는 장성한 조카들의 밥까지 챙겨야 했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밭일과 시골살림에 바빴고, 정작 나와 동생은 매로 다스리는 것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 큰 살림을 하면서, 큰엄마가 서울에서 자리 잡을 때까지 엄마와 할머니는 어린 조카들을 키워주었다. 

 어쩌다 둘째 큰엄마가 시골에 내려오면 시암에서 유독 내 발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둘째 큰엄마의 어깨를 잡고 바지를 걷어올리고 한 발을 들고 있으면, 매끄러운 이태리타올이 내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그렇게라도 미안함을 씻고 싶었을 큰엄마의 그을린 마음이 긴 세월을 지나 느껴진다.

 엄마의 매질은 내가 중학생이 되자 멈췄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가 이유 없이 때린 것은 아니었다. 주로 엄마의 말을 어겼을 경우였고 엄마는 무섭게 혼냈다. 시골이었지만, 도랑 하나만 건너면 도로가 있었다. 한 번은 동네 친구가 불량식품을 먹고 있어서 하나만 달라고 친구를 따라 도로 근처에 나갔다. 엄마가 도로가에 절대 가지 말라고 했지만, 도로가를 지나서 학교도 가고, 윗동네도 가고, 매일 다니는 길이라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동생이 내가 도로가에 나간 것을 엄마에게 말했고, 엄마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던졌다. 독자갈도······.

 내 입술에는 그때의 흉터가 아직도 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시절에는 다 그렇게 자랐고, 후에 왜 그렇게 나를 때렸냐고 물어보니 엄마는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엄마가 기억조차 못 하는 그 일은 무심코 잊고 있다가 입술을 보면 되살아난다. 이젠 나만 볼 수 있는 흉터처럼 희미해진 기억은 가끔 가슴을 짓누르곤 한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쌍둥이 언니들은, 작은 아버지와 작은 엄마가 아니었다면, 자신들이 이렇게 살고 있지 못할 거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잘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졸지에 쌍둥이 언니들이 생겼던 철 모른 나는 언니들과 함께하는 매일이 재미있었다. 때론 싸우기도 했지만 친자매처럼 지내던 언니들이 서울로 전학 갔을 땐, 감당하기 어려운 이별의 감정을 경험했다. 방학에 만날 수 있었지만, 언니들을 향한 그리움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엄마를 원망했던 엉킨 마음들이, 어두운 터널들을 지나서야 풀어지기 시작한다. 엄마는 서른 살의 꽃다운 나이에 키워야 할 조카들이 세 명이 생겼다. 만약 나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어린 나는 엄마를 원망했지만, 지금의 나는 엄마를 이해한다. 떠나지 않아 고맙다. 그래도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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