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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

아버님 저는 슬하에 자식이 두 명입니다

by 공작



슬하에 자녀가 몇 명이에요


남편이 간호사와 멀리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어색하게 시아버지와 둘이 있게 되었다. 결혼 후 시아버지를 몇 번 밖에 모시고 나오긴 했지만 콧줄로 영양분을 섭취하게 되신 후로는 거의 요양원에서 시아버지를 만나고 있다. 아버지와 인사 후 무슨 대화든 이어갈 수 있었지만 며느리를 여전히 몰라보시는 시아버지 옆에서 나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남편의 얼굴이 근심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간호사부터 만나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간혹 남편은 가장 중요한 일을 뒤로하고 가장 궁금한 것을 해결하려 하는 버릇이 있었다. 시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아들을, 오매불망 기다렸을 아들을 면회장에 내려와서 멀리서 지켜보게 하지 말고 먼저 자신의 아버지와 이야기해야 했다. 다섯 시간이 넘게 운전을 하고 내려와서 별로 얻을 게 없는 간호사와 이야기하느라 아까운 면회시간만 축내고 있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색한 시간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꼼짝 못 하고 침묵의 틈을 찾고 있던 찰나 더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적막을 깬 것은 시아버지였다.

"슬하에 자녀가 몇 명이에요"

시아버지가 나에게 처음 건넨 말이다. 나는 손주들의 이름과 나이를 다시 알려드렸다. 그리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시아버지가 꼭 내 마음을 아시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슬하에 자녀가 몇 명이냐는 물음은, 시아버지 옆에 있는 아이가 있을 법한 어떤 중년의 여성을 향한 궁금함을 넘어선 다른 것이었다. 내 손주들은 잘 있는지 궁금하다는 말을 어떻게든 하고 싶었지만 시아버지가 사는 세계에서는 그렇게 밖에 물어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상하게도 남처럼 여겨지는 시아버지의 질문에서 다정함을 느꼈다. 결혼 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다음엔 손주들도 데려오겠다고 이야기하니 곧 다음 질문을 건네셨다. 시누이들의 이름을 말하면서 1년째 못 봤으니 꼭 보고 싶다고 병원으로 자신을 보러 오라고 꼭 전해달라고 했다. 큰 시누는 원래 병원에 자주 오지 않는데 오지 않는 날이 너무 길어지니 시아버지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만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나를 울린 말은 "보고 싶다"였다. 남편과 시아버지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만큼 나는 아픈 마음을 화장지로 꾹꾹 누르며 소리 죽여 닦아냈다. 보고 싶다는 말이 내 심장을 고통스럽게 후볐다. 가장 가까이에 살면서도 자신은 자주 오지 않고 시아버님 병원에 무슨 일만 생기면 멀리 사는 남동생에게 맡기는 큰 시누가 밉기도 했지만 평생 시아버지를 보살피느라 들였던 비용과 시간 노력들은 내가 감히 평가할 수 없는 것이기에 시누를 향해 피어나려는 미움의 싹을 잘라버렸다.

면회가 끝나가자 아버님은 늘 하던 말씀을 끝으로 너무나 쿨하게 돌아섰다.

"간식비 넣고 가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려오느라 수고했다 차 정비 잘해라라고 여느 부모들처럼 걱정하는 부분을 표현했는데 그런 걱정은 잊어버리신듯했다. 간식비 넣고 가라는 말은 이젠 많이 드실 수도 없는 두유 비용을 매점에 꼭 충전해 놓고 가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미련 없이 돌아서는 시아버지의 모습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며느리로서 어색한 부끄러움에 또 한 번 눈물이 났다.

몇 개월 후,

이번 구정에 우리는 다시 시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큰 시누 작은시누, 작은 고모부,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지난번보다 더 쇠약한 모습으로 나오신 아버지가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딸들과 아들과 대화를 이어갔다. 역시 며느리인 나는 못 알아보셨다. 그 대화 속에서 나는 또 시아버지의 '보고 싶었다'는 한마디에 그만 고개를 떨구고 눈물만 흘렸다.

그러다 '간식비 넣고 가라'는 한마디에 나는 울다가 웃는 가족을 따라 웃었다.

시아버지는 그렇게 웃음을 주셨다.

'며늘아 그만 울어라. 난 괜찮단다. '

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아서 나는 또 운다.



끝없이 펼쳐지는 고속도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양희은의 "늘 그대"가 흘러나왔다.

시아버지가 생각나서 나는 또 운전하는 남편 모르게 눈물을 닦았다. 이제 이 노래가 나오기만 하면 나는 고장나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은 가족과 떨어져 서글플 때,

가족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을 것이다.


아버님, 저를 모르셔도 괜찮아요.

.

.

제가 늘 기억할게요...


최대한 빨리 또 아버님 뵈러 갈게요..





늘그대-- 양희은,성시경



어쩌면 산다는 건 말야


지금을 추억과 맞바꾸는 일


온종일 치운 집안 곳곳에


어느새 먼지가 또 내려앉듯


하루치의 시간은 흘러가



뭐랄까 그냥 그럴 때 있지


정말 아무것도 내 것 같지 않다고 느껴질 때



가만히 그대 이름을 부르곤 해


늘 그걸로 조금 나아져


모두 사라진다 해도 내 것인 한가지


늘 그댈 향해서 두근거리는 내 맘



오늘이 멀어지는 소리


계절이 계절로 흐르는 소리


천천히 내린 옅은 차 한잔


따스한 온기가 어느새 식듯


내 청춘도 그렇게 흐를까




뭐랄까 그냥 그럴 때 말야


더는 아무것도 머무르지 않는 게 서글플 때



숨 쉬듯 그대 얼굴을 떠올려봐


늘 그걸로 견딜 수 있어


모두 흘러가 버려도 내 곁에 한 사람


늘 그댄 공기처럼 여기 있어



또 가만히 그댈 생각해


늘 그걸로 조금 나아져


모두 사라진다 해도 내 것인 한가지


늘 그댈 향해서 두근거리는 내 맘



https://youtu.be/_DPsNRl-doU?si=pe2ejlam3_bgf4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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