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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희 Jun 21. 2021

낯선 유럽, 영국

도착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출발한 비행기는 겨우 두 시간 만에 런던 근교 개트윅 Gatwick 공항에 도착했다.

“런던에 얼마나 머물 건가요?”

“48일 예정이에요.”

“여행 일정이 길군요. 런던엔 무슨 일로 왔나요?”

“치즈를 보러 왔어요. 치즈에 관한 글을 쓰려고요.”

그러고는 나는 아직 묻지도 않은 수많은 질문들에 대비해 미리 만들어둔 자료를 꺼냈다. 한 달 반 후 파리로 가는 유로스타 기차표, 그날 밤 머물 런던 시내 숙소 예약 내역, 신용카드 한도 등등. 하지만 단 하나 꺼내지 않은 것,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표였다. 이제 겨우 7월 초인데 내 한국행 비행기표는 12월이었다. 5월 말에 출국해 스페인에서 이미 한 달 반을 여행한 터라 12월까지 유럽에 머문다면 얼추 봐도 7개월의 여정이었다.

비유럽연합 국민이 솅겐 조약국*을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는 기간은 90일. 영국은 솅겐 조약에 가입하지 않아 무비자 6개월까지 여행할 수 있지만 목적이 모호한 상태에서 오랜 기간 머무는 여행객은 불법체류 등을 우려해 입국이 거부될 가능성도 있다. 심사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영국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입국을 거절당한 사람들이 종종 있기에 입국 심사용 모법답안이 수없이 검색될 정도였다. 다행히 내가 만난 입국 심사관은 후덕한 풍채만큼이나 여유로운 사람이었고, 겨우 두 가지 질문에 긴장한 나는 알아서 속사포처럼 여행 일정을 쏟아냈다. 혼을 뺄 만큼 길었던 5분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여권에 입국 허가 도장이 찍혔다.


“입국 후 6개월 안에 떠나시오. Gatwick Airport 04.JUL.2013”     


스페인에서 한 달 넘게 머물며 스페인 발효식품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치즈 농가들을 방문하다가 영국으로 넘어온 건 한여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7월에서 8월 사이는 휴가 기간인 데다 더운 날씨 때문에 치즈를 만드는 일이든 농작물을 다루는 일이든 농장 일이 뜸할 시기다.  그러니까, 영국으로 건너온 이유는 여름을 나기 위해서였다. 도시는 아무리 휴가 기간이라도, 아무리 끓어오르는 높은 기온에라도 쉬지 않고  움직일 터이니,  가을이 오기 전까지 런던의 치즈가게들을 찾아보고 버스나 기차를 타고 작은 도시의 치즈가게나  공장도 다녀볼 생각이었다. 설령 여름휴가로 그곳들조차 문을 닫았다면 서점을 다니며 영국 치즈에 관한 자료라도 모을 참이었다. 뭐든 좋았다. 어차피 스페인 농가들의 황금기인 가을을   기다리며 시간을 때우기 위해 온 것이었으니까.

공항 앞 버스 정류장에서 8파운드에 끊은 런던 중심 가행 표를 들고 사람들 틈에 끼어 자리를 잡고 앉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확실히 40도를 넘나들던 바르셀로나보다는 낮은 기온이었다. 잘 도착했다는 안도와 아직은 정말 런던인가 싶은 묘한 기분에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표지판이 영어였다.


“이 버스표 여기서 기다리는 게 맞나요?”

“여기서 기다리는 거 맞아요. 버스는 제시간에 올 거예요. 10분 남았네요.”


 영어로 묻고 영어로 대답을 들을 수 있다니! 거기에 툭툭 튀는 듯한 휴 그랜트식 억양까지. 버스가 시내를 향해 가는 동안 피곤한 눈을 감지 못하게 만든 거리의 영문 표지판들. 설핏설핏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이 기분은 대체 뭐지 싶었다. 유럽 땅을 밟기 시작해 벌써 네 번째 지만 영어를 쓰는 나라에 간 적이 없었다. 프랑스 시골, 스위스 시골, 이탈리아 시골 그리고 스페인 시골까지. 나는 항상 누구에게나 말을 걸기 전 "혹시 영어를 할 줄 아시나요?"를 물어야 했고, 영어를 할 줄 아는 동네 사람을 찾아야 했고, 영어-프랑스어 사전, 영어-이탈리아어 사전, 영어-스페인어 사전을 끼고 다녀야 겨우 소통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곳에선 더 이상 "누구 영어 할 줄 아는 분 있어요!"가 필요 없었다. 마침내 영어를 쓰는 이상향의 유럽 땅에 도착했지만 이상한 나라에 온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     



 **솅겐 조약 :  1985년 6월 14일 룩셈부르크 남동부의 솅겐 마을에서 조약이 체결됐다. 인접 국가들의 국경을 넘을 때마다 여권 검사 없이 자유로이 드나들도록 한 조약을 의미한다. 입국 심사는 첫 도착지에서만 받으며 여행 중 머물 수 있는 기간은  90일, 이 이상 체류에는 비자가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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