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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희 Nov 09. 2021

월간 샘터 11월 호,  치즈 탐험'신비의 세계'

**'월간 샘터'로부터 기고 요청이 들어와 치즈에 관한 내용의 글을 작성했습니다.

아주 오래전 신문이 모든 매체를 대신하던 때 지하철 가판대에는 항상 '월간 샘터'가 걸려 있었습니다. 자주 가던 혜화동의  빨간 벽돌 건물에 '샘터' 출판사의 간판을 발견하곤 책만큼이나 출판사의 모습도 작고 예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샘터에서 글 의뢰가 들어왔을 때 기억의 그곳과 마침내 연결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글이 게재된 이번 11월 호는 프로 덕질러 들에 관한 내용을 다뤘으며 평균 20년 덕질 경력을 가진 분들의 글로 이뤄졌습니다. 제가 그 덕질러 중의 하나가 되어 감사하게도 참여했습니다.

- 월간 샘터와 협의 후 원문 그대로를 브런치에 게재합니다.-




--------- 덕력카드 ----------

덕질 대상 : 치즈

기간 : 약 15년

비용 : 1억 이상

주요 활동 : 2006년 프랑스와 스위스, 2008년 이탈리아, 2013년 영국으로 여행. 《치즈에 빠져 유럽을 누비다》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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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계절이 오면, 난 처음 치즈를 만났던 20년 전 파리의 시장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곤 한다. 2월의 추운 저녁, 에펠탑을 지나 콩코르드 광장을 향해 걷고 있던 나는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체력까지 바닥날 때쯤 마주한 곳은 골목 끝까지 줄지어 매달린 전구의 오렌지빛과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한 재래시장이었다. 


그 따뜻한 기운에 홀려 제일 먼저 구경하러 들어간 곳은 시장 초입에 있는 치즈 가게였다. 각양각색의 수 백 가지 치즈들이 진열대에서 쿰쿰하면서도 고소한 향이 꽁꽁 언 몸을 포근히 안아주는 듯했다. 치즈와 그만 첫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나는 맘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만약 파리에 다시 올 기회가 생긴다면 그땐 꼭 치즈 여행을 해야지!’.


치즈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가득 안고 돌아왔던 그 여행 이후 여느 사람들처럼 평범한 직장인으로 지냈지만 직장인으로 연차가 늘어날수록 치즈 생각은 점점 깊어졌고 다섯 해를 더 버티다 결국 사표를 내고 달랑 카메라와 수첩 몇 개만 들고 5개월간의 유럽여행을 떠났다. 치즈 하나만 보고 떠난 타국에서의 생활이 녹록할 리 없었다. 파리에서 베이비시터로 일하며 불어 학원에 등록해 현지어를 공부하면서 하루 두세 군데의 치즈 가게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성에 차지 않아 결국 자동차를 빌려 치즈 농장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치즈를 관찰하고 맛보았다. 농장들이 워낙 산골짜기에 위치해 있던 숙소도 따로 없던 터라 캠핑이 최선책이었는데 당시에는 내비게이션의 보급이 적어서 오로지 지도와 나침반에 의지해 프랑스와 스위스의 방방곡곡을 누볐다.


한 번은 스위스 산자락에 텐트를 쳤는데 5월이었는데도 손이 꽁꽁 얼 만큼 날이 추웠다. 전기 그릴에 겨우겨우 몸을 녹여가며 외롭고 추운 밤을 보내자니 ‘셰프도 아니고 미식가도 아닌데 고작 치즈 하나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싶은 생각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때 처음 치즈 때문에 울었다.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타국의 날씨만큼 나를 힘들게 한 건 극한의 피로였다. 프랑스 땅이 워낙 넓다 보니 밤 운전을 자주 했는데, 운전 중 깜박 졸다가 그만 이면 도로로 차가 휘어져 돌진한 위험천만한 상황도 있었다. 엄청난 굉음을 내며 차가 멈춘 순간 치즈 공부고 뭐고 다 끝났다고 절망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웬걸, 차는 신기할 정도로 멀쩡했고 망가진 차 대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별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그 순간 내 귀에는 여행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하늘의 격려가 들렸다.

 

세상에 존재하는 삶의 다양한 맛


여행을 할수록 치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이유들이 발견됐다. 그중 사람들이 사는 환경에 맞춰 기꺼이 성질을 바꾸는 치즈의 그 유연한 태도에 마음이 강하게 끌렸다. 프랑스 북부의 따뜻한 해변 마을 노르망디에서는 오랜 보관이 어려워 짧은 숙성과 빠른 소비가 가능한 카망베르가 만들어지고, 똑같이 바닷가의 따뜻한 기온이지만 농사일을 돕는 물소의 젖을 이용해 만드는 이탈리아 나폴리 근교에서는 모차렐라 치즈가 만들어진다. 어느 지역이든 그들이 속한 삶의 환경에 맞춰 만들기에 치즈를 찾아가는 여행이 내가 몰랐던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지금도 치즈를 말할 때면 모양이나 종류가 아닌 치즈를 만드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해도 뜨지 않은 농장의 새벽, 잠이 덜 깨 울어대는 젖소들, 온몸에 스미는 추위 그리고 치즈 제조장에 가득 채워지는 따뜻한 우유의 향기…. 이 모든 것들이 적절히 어우러져야 마침내 완성되는 치즈. 자연과 사람의 합작품 같은 그 음식에서 난 아마 앞으로 헤어 나오기 힘들 거라 직감했다.


프랑스와 스위스 여행에서 돌아와 이탈리아를 거쳐 마지막으로 영국으로 치즈 여행을 다녀온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여전히 난 치즈와 사이좋게 손잡고 삶을 여행 중이다. 영국에서 경험한 치즈의 맛과 사연을 추억하며 온라인에 꾸준히 후일담을 업로드하고 있으며, 미처 파악하지 못한 치즈에 대한 역사적 배경이나 제조 환경 등을 많은 시간을 할애해 공부하는 중이다. 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식품관의 치즈 코너를 꼭 들러, 국내에 새로 들어온 치즈는 무엇이 있는지 체크하고 그중 몰랐던 종류가 보이면 그 자리에서 검색해 제조국, 사용된 원유, 숙성 기간 등의 정보를 반드시 파악해둔다.


내 식탁 위에서도 치즈는 빼놓을 수 없는 요리 재료가 되었다. 생모차렐라 치즈를 손으로 듬성듬성 떼어내 접시에 담고 각종 채소와 올리브유, 말린 허브와 파르미자노 레지아노 치즈 가루를 넣으면 간단하지만 풍미 깊은 치즈 샐러드가 된다. 치즈를 강판에 곱게 갈아 샐러드용 토핑으로 사용하거나 얇게 썰어 토스트에 올려 녹여 먹는 것도 종종 즐기는 레시피다.


치즈는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생의 친구로 자리 잡았다. 직장에서는 온전히 내 것이었던 것이 없어 항상 불안했지만 내가 직접 쌓은 지식과 경험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온전히 나의 자산으로 남아 있을 것이기에 소중하다. 화려하진 않아도 올곧은 치즈는 이렇게 내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이 글은 샘터 출판사의 블로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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