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건축의 장엄
몇 해 전, 한옥을 신축하는 현장에서 현장을 보러 오신 분과 이야기하다가 그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한옥은 정형화된 모습이 있고, 거기서 조금만 벗어나도 한옥이 아니라고 하니,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다 똑같은 모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수적이라는 말속에는 창고 속에 들어가서 다시는 빛을 볼 수 없는, 골동품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반박하기 어려운 점은 정전을 제외한 궁궐 건축과 서원, 향교와 같은 유교 건축, 그리고 주택까지 부재의 굵기 차이와 단청의 유무, 그리고 약간의 장식적 차이 날 뿐이지 모두가 정형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건축들의 특징은 유교의 영향을 받은 건축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지배계층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통치의 근간으로 삼았습니다. 어느 하나의 주장에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것을 경계하고 인간생활 전반에 일정한 질서가 유지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유교의 합리정신과 질서관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대두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엄격한 질서와 합리성을 내세우는 단정하고 검소한 조형이 주류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만약 고려시대의 궁궐 건축이나 주택이 많이 남아있으면 어떨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건물만 있어서 유교화 된 건축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정형화된 유교 건축과 다른 길을 걷는 건축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 바로 불교 건축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였습니다. 고려시대에 귀족층의 지원을 받던 불교 사찰에서는 대규모 예불이 자주 치러졌고 야외 마당에서 예불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다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고려는 망하고, 유교 국가인 조선이 건국했습니다. 조선 초기에 표면적으로는 정책적 억압을 받았지만, 그래도 왕실의 후원 아래 어느 정도 절의 세력을 유지하는 불교는 16세기 중종조 이후에는 회복하기 어려운 억압의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도시에서 밀려난 사찰은 이전 시대와 같이 대규모 법회가 치러지기 어려워지고, 신도들의 소규모 예불과 법회를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종파가 사라지고 사찰이 산간의 수행도량으로 유지되는 17세기 이후에 와서는 법당의 일상적인 예불이 실내에서 치러지게 되면서 실내공간이 중요한 예불 공간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실내 공간이 중요하게 되다 보니, 18세기가 되어서는 실내를 장엄하게 꾸미려는 장식 성향이 유행하고, 건물의 특정 부분을 과장되게 표현하려는 시도도 나타납니다.
처음 말씀드릴 사찰 건축의 장엄은 닫집입니다. 혹시 법당에 들어가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법당에 들어가면 부처님 머리 위에 화려하게 꾸민 집이 단연 눈에 띄는데, 이것을 닫집이라고 합니다. 고대 불전에서는 부처님을 중앙에 모셨고, 금당 자체가 부처님 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위에 말씀드린 대로 예불이 불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불의 실내화가 되면서, 신도들이 들어오기 위해 마루가 깔리고 부처님이 금당의 안쪽에 위치하게 되면서, 금당 안에 부처님의 집을 별도로 만들어야 했고, 그렇게 시작한 것이 닫집입니다. 닫집은 불국정토의 궁전을 가리키는 적멸궁, 칠보궁, 만월궁 등을 상징하는데, 이들은 각각 석가, 아미타, 약사를 모시는 궁전입니다.
용의 모습을 한 장식도 빼놓을 수 없는 사찰 건축 장엄의 특징입니다. 용이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이며, 삼국시대의 용은 권위의 상징으로 쓰이게 됩니다. 이러현 현상은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이어졌으며,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왕의 상징으로 쓰이게 됩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유교 국가인 조선은 이념에 따라 용이 왕이나 권력의 상징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는데, 여전히 민중 속에는 흡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사찰건축에서 용이 건축부재로 조각이 됩니다. 이때 새로운 부재가 사용되기보다는 기존 부재를 용의 머리로 조각하여 사용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용머리가 조각되는 대표적인 부재는 "안초공"이라는 부재와 "충량"이라는 부재입니다. 그리고 공포에도 용머리가 조각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초공"은 기둥 위에 공포가 놓이는 경우 기둥머리에 보 방향으로 끼워 평방을 감싸도록 한 부재이며, 궁궐 건축에서는 당초무늬로 간략하게 표현을 하나, 사찰 건축에서는 용을 조각하여, 구조적인 역할과 장식적인 역할을 겸하고 있습니다.
"충량"은 측면에 있는 기둥에서 그 옆에 있는 대들보 위로 올라간 보를 말합니다. 이 충량에 의지해서 도리가 짜이고, 그 도리 위에 추녀가 올라갑니다. 그래서 충량은 팔작지붕과 우진각지붕에만 설치가 되는 부재입니다. 이 부재는 대들보 위에 올라타기 때문에 보의 끝이 노출되는데, 이 끝을 그냥 두지 않고 용으로 조각을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조재이면서 장식적인 역할을 겸하는 것입니다.
창살을 형식의 구애 없이 꽃을 비롯한 여러 무늬를 장식한 것을 꽃살이라고 하며, 이 꽃살문도 사찰 건축 장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18세기 사찰 건축에서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긴 하는데, 특히 서해 바다에 면한 해안 지역 사찰(해남 대흥사, 고창 선운사, 부안 내소사, 논산 쌍계사, 강화 정수사 등)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 흥미롭습니다.
그 밖에도 공포의 살미 부분을 연꽃이나 봉황으로 조각하기도 하고, 천장에 봉황이 날아다니기도 하며, 사자나 코끼리, 그리고 악기, 구름 등을 꾸미기도 하는 등 다양한 조각과 장식으로 장엄을 표현하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 안에서, 부처님과 마주 보고 앉아있는 경험이 있으신 분은 많지 않으실 겁니다. 저는 일 때문에 논산에 갔다가 늦은 오후에 갑자기 논산 쌍계사 대웅전에 갔습니다. 무엇에 이끌려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부처님이 부르신 걸 지도 모르겠네요. 어둑해지는 어둠 속에서 홀로 부처님과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부처님 머리 위에 닫집과, 그 주위를 날아다니는 봉황, 그리고 화려한 단청 등으로 순식간에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온 느낌이었습니다. 절대적인 고독 속에 부처님 앞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했고, 부처님이 저의 말을 들어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 부처님 앞에서 기원했던 소소한 일들은 지금까지 그 덕을 받아 잘 이뤄지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씩 어둑해지는 저녁 어스름에는, 그때 그 대웅전 안에서의 제가 생각납니다.
*글 쓰는데 도움받은 문헌
김도경, 『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 현암사, 2011.
김동욱, 『개정 한국건축의 역사』, 기문당, 2007.
김현정・천득염, 『조선후기 사찰건축에 나타난 용장식』,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