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거북이일지라도
미국 드라마를 보면 꼭 조깅을 하는 사람이 나온다.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나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서울에서도 뛰는 사람이 심심치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외국인도 많았는데 그들은 도저히 달리기에 어울리지 않는 도심 한가운데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뛰었다. 한편으로는 존경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담아 신기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랬던 내가 퇴근 시간,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사무실을 나섰다. 지하철역으로 향하지 않고 귀가하는 직장인들 사이를 해치며 달렸다. 을지로, 남산, 광화문, 청계천 어디든 발이 닿는 대로 뛰는 동안 걸을 때와는 다른 인상을 받았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정신없는 풍경인데 달리면서 보면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집 근처를 달릴 때는 그저 하루를 온전히 마감하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뛰지만, 퇴근길 도심을 달릴 때는 아직 하루치 에너지를 다 소진하지 않은 상황에서 낯선 환경이 주는 짜릿함을 만끽하며 신나게 달렸다. 그 재미가 좋아서 조금 번거롭고 귀찮지만 종종 퇴근길 도심 달리기를 즐겼다.
서울은 달리기 좋은 도시다. 우선 도시를 좌우로 가로지르는 한강이 있다는 것에서 게임은 끝났다. 큰 물길을 옆에 끼고 달리면 그 아름다운 풍광이 모두 내 것이 된 느낌이다. 몇 년 전 초가을, 뚝섬유원지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 참여해 생애 첫 5km 달리기에 도전했다. 5km를 쉬지 않고 달리기는 처음이라 몸에 무리가 오면 잠깐이라도 쉴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거북이 속도로나마 단 한 번도 걷지 않았다. 숨이 찰 때마다 한강을 바라보며 기운을 얻은 덕분이었다.
한강이 멀다 해도 아쉬울 것은 없다. 이 도시에는 어디에나 물길이 있다. 종로구와 동대문구에는 청계천이 있고, 서초구와 강남구에는 양재천이, 노원구에는 당현천과 중랑천이 있다. 폭이 좁은 천이든 넓은 천이든 한 방향으로 흐르는 물길은 달리는 이에게 길을 안내해주고, 지칠 때는 힘내라고 졸졸 흐르는 소리로 응원을 건넨다. 천변을 뛰며 사시사철 변화하는 자연을 실감하는 것도 큰 기쁨이다. 달리다 보면 계절을 네 덩어리로 나눈 것은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을 느끼며,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턱턱 숨을 막는 높은 습도와 기온을 느끼며 24절기를 나눈 세심한 조상의 지혜에 감탄한다.
달리기 앱에 기록을 남긴 지 4년이 됐다. 1km도 뛰기 힘들었던 내가 10km까지 달릴 수 있게 됐다. 숨을 고르고, 규칙적으로 발을 내디디며 어제보다 조금 더 강인한 사람이 됐다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착각도 잠시. 어느 길에나 나보다 더 빨리 달리는 러너가 있다. 고라니 같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총총 앞서가는 그들을 보며 기가 죽을 때면 '모두에게는 각자의 속도가 있다'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걷는 것보다 느린 속도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어르신들을 볼 때에도 같은 생각을 한다. 서울에 사는 것도 달리기와 마찬가지다. 때로는 한계를 모르고 저만큼 앞서 질주하는 사람을 보며 나는 왜 이리 느린가 좌절도 할 때도 있지만 속도보다 더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리는 꾸준함이다. 저마다의 끈기와 인내심을 무기로 꾸준히 달리는 도시의 모든 러너를 응원한다.
Photo by jack atkinso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