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밀라 팡,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엄마, 인간 사용 설명서는 없나요?"
카밀라 팡에게 인간을 이해하는 일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카밀라는 자폐스펙트럼장애, 주의력결핍과잉활동장애, 범불안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쉽게 격한 감정에 휩싸이고, 기이한 행동을 했으며, 종종 자제력을 잃고 정신적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가 삼촌의 서재에서 명확한 관점으로 사람이라는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언어를 만나게 된다. 그게 바로 '과학'이다. 카밀라 팡에게 과학은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었고, 어떻게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지 실험해 볼 수 있는 기반이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은 자폐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영국인 과학자가 머신러닝, 열역학, 생물화학, 양자물리학, 딥러닝, 게임이론 등 다양한 과학 영역을 넘나들면서 사람을 이해하고 타인과 연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과학이 이렇게나 우리와 사람, 그리고 그 관계를 알아가는 방법인 줄 알았다면 진작 공부할걸, 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책.
카밀라 팡은 머신러닝의 비지도학습 과정을 따라가며 '나무'처럼 어떤 결정을 내리는 생각의 지도를 만든다. 우리 몸속의 단백질을 떠올리며 다른 사람들의 다름을 이해하게 된다. 여러 단백질을 인간세상의 MBTI에 빗대서 설명하는 파트는 정말 기발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 방은 왜 더러운가를 열역학 법칙에 의거해 설명하며, 빛의 파동을 얘기하면서는 두려움에 맞서는 방법을 소개한다.
과학에 무지했던 내게는 모든 챕터의 설명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제일 좋았던 것은 머신러닝 및 딥러닝에 있어 오류의 수용과 실패에 대한 관점이었다. 과학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싶다면 무질서를 수용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어떤 가설이 기대만큼 훌륭하지 않다면 철회하거나 조정하는데 주저하지 말란다. 과학은 오류를 딛고 번성하기 때문이다. 머신러닝에서 '실수'는 정상이란다. 우리가 실수를 생각할 때 과학적 렌즈가 아니라 감성적인 렌즈를 이용하도록 배웠기 때문에 표준오차를 흔쾌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라고 강조한다.
약간의 차질을 빚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혹은 그 체계나 결정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기에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 역사상 모든 과학자와 기술자가 오류에 이런 식으로 대응했다면 인류는 지금까지 성취한 것의 일부만 얻었을 것이다.
딥러닝을 얘기하면서 말하는 '기억'도 재미있었다. 기억은 과거에 만들어지지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은 현재와 미래의 의사 결정에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기억하는 것은 미래에 어떻게 결정할지와 연결되고, 이를 알고 있다면 어떤 대상이나 특정 상황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을 바꾸고, 지속적으로 가중치를 달리 주는 시도를 해보라는 것. 결국 뇌과학으로 연결되니, 세상 만물의 이치는 돌고 돈다. 재미있다.
살면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지만, 기억이 이런 경험을 저장하고 활용하는데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 우리가 가중치를 부여한 대상, 그 사실을 기억하는 방식과 이유는 완벽하게 우리의 통제에 놓여있다.
마지막으로 책 말미에 나왔던 문단을 남긴다. 그 많은 과학의 영역에서 하고자 했던 말은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과학이 오류를 기반으로 발전하듯,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시도와 실패의 자유를 허할 것, 다만 경로를 수정해 계속 나아갈 것. 서로 다름을 인정할 것. 다른 관점으로 나를, 타인을, 관계를 생각해 볼 것.
실현되지 않은 계획에, 이루지 못한 목표에, 실패한 관계에 절망하지 말 것. 대신 거기서 배우라. 그리고 다음에는 조금 다른 것을 시도해 보자. 나만의 방식으로 일하는 법도 실험해 보자. 삶이 나아지는 과정은 느리고 점진적이라는 인간의 필연성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다름을 악마 취급하지 마라. 내가 그랬듯이, 당신이 타고난 초능력으로 차이를 수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