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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계절 May 07. 2023

이야기를 탐닉하는 당신에게

윌 스토 <이야기의 탄생>을 읽었다

흥미롭게 읽다가 서서히 숨이 막혔다. 수많은 심리학자, 신경 과학자, 유명한 스토리텔링 사례들은 꽤나 재미있었지만, 익숙지 않은 이론과 지식에 압도되었고, 소설가를 위한 작법책이라는 생각이 들자 곧 길을 잃었다.


몇 번을 쉬어가다 끝내 다 읽었을 땐, 예상치 못한 만족감에 헛웃음이 나왔다. (뭐지, 이 반전은. 중간까지 읽었을 때만 해도, 이 책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지.) 이 책은 단순한 스토리텔링 법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심리학 책이며, 인문학 책이고, 뇌과학 책이었으며, 세계관에 대한 책이었다. 저자가 서문에 얘기하듯, '이야기가 없다면 인간을 이해할 길이 없기에', 근본적으로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요즘의 화두인 생성 AI, 특히 루다가 떠오르는 지점도 꽤 있었고, 스토리텔링 관점에서 나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게도 하더라. '나는 결국 어떤 사람인가?',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데 기여하고 있는, 나의 치명적인 결함은 무엇인가?', '나의 이야기의 발화점은, 즉 변화의 지점은 어디인가?'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 질문'은 이것. '나는 (여전히) 변할 만큼 용감한가?'.

...

용감해야 하겠지. 계속 변해야, 그래야, 내 이야기도 멈추지 않고 또다시 시작될 것이므로.


<이야기의 탄생>은 우리의 뇌가 반응하는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지에 대해 심리학 및 뇌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책이다.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인물'이고, 그 이야기의 시작은 '변화'이며, 저마다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환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결함'이 있는 인물이 훨씬 흥미롭게 다가오고, 이야기의 결말은 결국 '우리가(또는 인물이) 누구인가라는 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것.


“한 인간을 진실로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람의 결함을 기술하는 것”

이 책의 핵심이자,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결함'이라는 것. 요즘 시대가 원하는 것도 이 키워드와 맞닿아 있는데, 본인의 결함을 인지하고, 인정하고, 나아가 이를 오히려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것에 열광하고, 이를 소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스타트업이나 사람들의 실패가 공감과 영감을 주는 것도 이 관점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고, 새로운 캐릭터나 브랜드를 창조하는 경우에도 빠질 수 없는 요소다. 결함이 그 사람을 진실로 정의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 깊게 남는다.



"우리의 뇌는 데이터 프로세서가 아니다"

이야기에 듣고 뇌에서 형성하는 여러 모형(model)이 계속 언급된다. 세계 모형, 연상 모형, 환각 모형 등. 이야기를 읽을 때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모형을 구축하면서 그 이야기를 경험하기에 *말로 표현하지 말고 보여줘서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거나, *촉감, 맛, 냄새 등을 표현해서 감각이 재현될 수 있도록 한다거나, *은유적인 표현을 쓰면서 언어에 추가적 의미를 부여하면 좋다고 말한다.


'그는 힘든 하루를 보냈다'보다 '그는 거친 하루를 보냈다'가, '그녀는 부담을 느꼈다'라는 표현보다 '그녀는 막중한 짐을 짊어졌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뇌의 신경모형을 추가로 활성화시켜서 언어에 추가적인 의미와 감각을 더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생성 AI나 이루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떠올랐다. AI가 주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토리텔링이 곧 가능하겠지?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마음에 남은 마지막 질문. 이야기의 중심은 인물이요, 시작은 변화, 그리고 그 스토리텔링의 끝은 어떤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 소설 속에, 영화 속에, 나의 삶에, 우리의 삶에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일 수도 있겠다. 저자가 플롯보다 인물을 중요하게 생각하듯,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든, 어떤 사건 사고에 휘말리든, 어떤 선택을 할지는 우리가 결정을 하며, 그게 스토리텔링의 시작과 끝이다. (이렇게 쓰다 보니, 어째 이 지점에서는 <죽음의 수용서에서> 책과도 연결된다.)


아, 배부르다. 꾸역꾸역 다 읽은 나 자신에게 박수를.

그만큼 남았다. 내 안에, 무언가.



책 속에서 메모한 문장들


서론

이야기가 없다면 인간을 이해할 길이 없다. 이야기가 곧 우리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을 뇌로 사로잡아 관심을 유지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나는 인간의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하면 모두가 저마다의 일을 더 잘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강렬하고 심오하면서도 독창적인 플롯은 주요 원칙을 나열한 목록이 아니라 인물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믿는다.


1장: 만들어진 세계

많은 이야기가 예기치 못한 변화의 순간에 시작된다. 우리가 듣는 모든 이야기는 결국 ‘뭔가가 변화한’ 이야기다. 변화는 우리의 뇌에서 끝없이 매력적으로 느끼는 현상이다.

뜻밖의 변화라는 우주의 갈라진 틈새로 미래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변화는 희망이자 약속이고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굴곡진 여정이다. 삶에서 예기치 못한 변화와 맞닥뜨릴 때 우리는 알고 싶어 한다.

변화가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행동한다. 그리고 그 순간에 이야기가 시작된다.

뇌는 외부 세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정보를 받아서 신경계 모형으로 변환한다. 책의 글자를 눈으로 훑으면 글자에 내포된 정보가 전기 파장으로 변환되고, 뇌가 그 파장을 받아 글자들이 제공하는 정보의 모형을 생성한다. 책에 적힌 단어들이 경첩 하나로 매달린 헛간 문을 묘사하면 독자의 뇌에서도 경첩 하나로 매달린 헛간 문 모형을 생성하는 것이다.

독자의 뇌는 작가가 원래 상상한 모형의 세계를 각자 다시 구축하는 것이다.

참신한 은유는 시각적 이미지를 환기해서 생각을 지원한다.

최근의 연구에서 진부한 은유를 남용하면 ‘닿고 닳은’ 표현이 되는 현상을 입증했다. “익숙한 표현일수록 운동계가 적게 활성화됐다. 말하자면 은유적 표현을 남용하면, 적어도 은유적 시뮬레이션을 끌어내는 정도를 기준으로 측정할 때는 표현의 강렬함과 선명함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예기치 못한 변화가 일어나거나 정보의 격차가 벌어지거나 아니면 이 두 가지 모두의 상황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사이 우리도 같은 상황에 처하고 우리의 집중력에 불이 켜진다.

좋은 이야기는 인간의 조건을 탐구한다. 극의 표면에서 벌어지는 사건보다 인물에 더 집중한다. 낯선 마음으로 떠나는 흥미진진한 여행이다.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인물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우리가 그 인물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극적인 싸움을 제공하는 이유는 그가 성공하고 매력적인 미소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진 결함 때문이다.


2장 결함 있는 자아

조지프 캠벨은 “한 인간을 진실로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람의 결함을 기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물을 구상할 때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통제 이론을 중심으로 하면 도움이 된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품의 첫 페이지부터 매력적이면서도 결함이 있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의 마음과 삶을 들여다보는 편이 훨씬 흥미롭고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다.

놀이는 사회적 마음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뇌는 교묘한 편견을 무기로 결함 있는 세계 모형을 방어한다.

우리가 현실과 이약에서 접하는 갈등은 주로 이런 신경 모형과 세계 모형을 방어하는 행동과 연관된다.

기억은 가변적이고 왜곡과 변형에 취약할 수 있다. 심리학자 캐럴 태브리스와 엘리엇 애런슨 교수에 의하면 '단연코' 가장 중요한 기억 왜곡은 '자신의 삶을 정당화해 주고 설명해 주는' 왜곡이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인물에 관한 것이다.


3장 극적 질문

스토리텔링의 비밀이 하나 있다면 이 질문에 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혹은 인물 관점에서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우리의 신경 모형 속에 있다.

우리 머릿속에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모형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다양한 모형들도 들어있어서 각각의 모형은 주도권을 차지하려고 끊임없이 싸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제한다고 믿지만 주변 세계와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형된다. 차이가 있다면 이야기와 달리 인생에서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극적 질문이 끝내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좋은 이야기에서는 주요 인물이 다른 인물들과 부딪히면서 조금씩 변화한다. 인물들은 충돌하고 서로를 튕겨내고, 결국에는 새롭게 변형된 방식으로 다시 충돌하고 다시 튕겨내고 다시 만나는 식으로 플롯 전체에서 우아하고 인상적인 변화의 춤을 춘다.

스토리텔링의 모든 원칙이 대화의 기술로 통합된다. 대화는 변화무쌍해야 하고 무언가를 원해야 하며, 인물의 개성과 관점을 풍부하게 담아야 하고 의식과 잠재의식 두 차원 모두에서 작동해야 한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언어가 애초에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기 위해 진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좋은 스토리텔링은 좋은 심리학과 좋은 신경과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동을 깊이 탐색한다.

성인이 된 우리가 진실이라고 경험하는 환각은 우리의 과거에 구축된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각자 자신의 상처를 보고 느끼고 설명한다.

우리는 왜곡되고 부서졌대도 절대적으로 선명하고 현실적으로 보이는 세계 모형을 통해 세상을 내다보면서 성장한다.

우리는 변화할 만큼 용감한가? 이야기의 플롯이, 그리고 인생이 우리에게 묻는다.


4장 플롯과 결말

이야기의 사건은 인물의 정체성의 핵심을 건드리도록 설계되어 있으므로 인물이 바꿔야 하는 부분은 그가 가장 바꾸기 힘든 부분이 된다. 인물이 잠재의식 차원에서 결함 있는 세계 모형을 완전히 바꾸려면 거의 초자연적인 힘과 용기를 끌어내야 한다.

모든 이야기가 변화라면 당연히 변화가 멈출 때 이야기도 끝날 것이다.

이야기는 지혜를 선물한다.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우리가 얼마나 틀렸는지 우리 자신은 전혀 모른다는데 있다.

결함을 마주하고 고쳐가는 일은 평생의 싸움이 된다. 이야기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이기는 것이 영웅이 되는 길이다.

이야기는 진실한 위안을 준다. 이야기에서 누군가의 결함 있는 마음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만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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