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l Fiscalina ~ Rifugio Locatelli / Dreizinnenhütte
9.15분 Val Fiscalina에 내려 트래킹 시작.
12시 45분 로카텔리 산장 도착.
지난번 Val Fiscalina ~ Rifugio Zsigmondy Comici 보다 시간은 더 걸리지만 길도 덜 험하고길을 잃을 염려도 전혀 없어서 비교적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날씨가 안 좋으니 사람들도 없다. 올라가는 내내 딱 한 커플 만났다. 축축한 산길에 안개로 경치도 즐길 수 없고, 사람은 없고, 스산하고..
그래도 예약금도 받지 않고 예약을 받아준 날 믿어준 산장에 대한 예의, 그리고 한국사람으로서의 예약에 대한 책임감 같은 걸로 나를 다독이며 걸었다.
비와 안개로 뒤덮인 로카텔리 산장은 춥다. 점심을 먹고, 기다렸다가 3시 체크인 시간에 맞춰 줄을 섰다.
체크인은 완전 아날로그 방식... 종이에 빽빽이 적혀있는 예약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아 침대번호가 매겨진 종이에서 빈 침대칸에 내 이름을 적고 내게 침대번호를 준다. 당연히 현금결제.
침대는 아랫칸으로 해달라고 부탁하니 침대목록표에서 다른 사람이름이랑 내 이름을 바꿔 아래쪽 침대를 배정받은 건 다행인데, 올라가 보니 아우론조처럼 이불을 주는 줄 알았는데달랑 담요 두 개만 있다. 아우론조 산장에 묵을 때 두 번이나와봤기에여기가 위치상 인터넷은 물론 도로가 닿지 않는 오지라 아우론조보다 시설이 안 좋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너무 열악하다. 그때는 2층 숙소까지는 못 올라가 보고 아래층 식당에만 있었는데 식당은 여늬 산장과 다름없이 커피, 맥주, 다양한 메뉴의 음식들이 다 준비되어 있어서, 이렇게 음식에 제한이 없고, 여기서도 맥주나 차가운 음료를 다 마실 수 있다면 객실이 조금 불편은 하겠지만 아우론조랑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더운물이 안 나오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건 혹시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로만 알았다.
샤워실은 아예 없고, 그저 남녀 세면장에 수도꼭지가 3개씩 달린 커다란 세면대 3개에서 차가운 물만 나올 뿐. 그나마 다행인 건 화장실 변기가 수세식이라는 것. 그냥 작은 수건에 물 묻혀서 대충 땀만 닦고 담요를 반으로 접어 두껍게 덮었지만 밤엔 어떨지 모르겠다. 발이 시려 양말도 벗을 수가 없다. 날이라도 따뜻하고 해가 나면 덜 추웠을 텐데.. 여긴 침낭내피가 아니라 침낭이 필요한 것 같다.
로카텔리 산장 예약하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예약이 힘든데 그 어려운 예약을 하면 뭐 하나.. 석양에 비치는 트레치메가 장관이라 그걸 보러 여기서 자는 건데 이렇게 구름이 잔뜩이니..ㅠㅠ
내 윗 침대엔 Sunny라는 이름의 미국에 사는 일본교포여성. 그녀는 비디오까지 찍어서 동영상을 올린다며 내게 명함을 주었다. 어찌나 씩씩한지.. 그녀는 여기서 2박을 할 거라니 어쩜 내일은 트레치메의 일몰을 찍을 수도 있겠지...
씻고 담요를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워있어도 춥다. 아예 사람들 많은 바에 있는 게 덜 추울 듯하여 내려갔는데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들 얘기하느라 엄청 시끄럽다. 기모레깅스에 바지를 덧입고, 위에는 얇은 플리스에 재킷을 걸치고, 허리엔 핫팩을 넣고 사람들 온기에 기대앉아있어도 으슬으슬 춥다.
아침에 패딩을 넣는다는 걸 깜빡했지만 아우론조에선 비슷한 날씨에도 플리스에 쟈켓만으로도 춥지는 않았기에 설마 했는데... 혼자인 사람은 거의 없고 밖엔 비가 오니 더구나 이 좁은 공간에 꾸역꾸역 끼어 앉아 떠들고 있어서 책을 가지고 내려왔으나 읽을 도리가 없다.
6시 저녁식사시간. 커다란 식탁에 세 커플들과 함께앉았다. 내 옆은 미국에서 온 젊은 홍콩남자와 대만여자 커플. 이 복잡하고 사람 많은 곳에서 침대 위칸도, 식탁 옆자리도 같은 동양인들과함께 있으니 왠지 덜 낯설고 편안하다.
더운물도 안 나오고 샤워도 못하는데 식사는 풀코스로 식탁마다 일일이 주문을 받아 우아하게 접시에 내온다. 음식에 진심인 이탈리아 사람들.. 존경합니다..ㅋ 다들 애피타이저로 파스타나 뇨끼를 먹고 메인엔 고기요리, 그리고도 디저트로 티라미수까지 먹는데, 난 애피타이저는 수프, 메인은 폴렌따, 디저트는 수박 한 조각을 주문했다. 추운데 따끈한 수프를 먹으면 몸이 풀릴 것 같아 남들 다 파스타나 뇨끼 주문하는데 혼자 수프를 주문했는데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고 짜서 몇 술 뜨고 그만뒀다.
식사 내내 옆에 앉은 대만커플과 얘기했는데, 서로 영어가 외국어인 데다 동양적 사고나 감성이 있어 영어가 어눌하고 표현이 서툴러도 그냥 편하게 얘기한다. 여행하면서 외국사람들과 얘기할 때마다 경어가 없다는 게 몇십 년 나이차가 나는 젊은 세대와도 나이를 떠나 수평적으로소통할 수 있어서 좀 더 친밀하고 편하게 느껴진다는 걸 새삼 또 느낀다. 나이의 위계에 익숙한 동양인들끼리라도 언어가 바뀌니 소통의 방식도, 느낌도 다르다.
예약이 꽉 차 있을 줄 알았는데 날씨가 안 좋아 사람들이 예약부도를 낸 건지 어쩐 건지 내가 있는 24인실은 반도 안 차고 텅텅 비어있다. 덕분에 다른 침대의 담요를 끌어다 네 겹으로 만들어 놓았다. 춥다고 담요를 더 달라고 부탁했더니 어느새 가져다 놓은 두툼한 담요까지 합해서 총 5장의 담요를 덮고 누웠다. 하룻밤만 자면 되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