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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O Aug 16. 2024

난 살아있어(I GOT LIFE)

▲니나 시몬이 강가에 있는 벤치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출처=Little Girl Blue(2021-Stereo Remaster) 앨범 자켓


[이민호의 차별 속으로] '난 살아있어(I Got Life)' | 더인디고 (theindigo.co.kr)



#이민호_차별속으로 #공민권운동 #인종차별 #흑인차별 #니나시몬 #Ninasimone


난 살아있어(I GOT LIFE)


존 레논, 엘튼 존, 마돈나, 비욘세,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데이비드 보위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으로 니나 시몬(Nina Simone)을 꼽는다. 예술가들이 존경하는 예술가인 동시에 음악으로 흑인민권운동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니나 시몬의 본명은 유니스 캐슬린 웨이먼(Eunice Kathleen Waymon)이라는 이름으로 1933년 2월 21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난다. 3살 때부터 귀로 들은 음악을 피아노로 바로 칠 수 있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어머니는 감리교 교회 장로였고, 아버지는 전도사였다. 그러다 보니 니나는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찬송가 반주를 도맡아 했다.

12살 때에 첫 콘서트를 열었는데, 1940년 당시에는 미국 내 인종차별이 극심했었기에 백인 관객들이 앞에 앉고 흑인인 니나 시몬의 부모는 뒷줄에 앉아야만 했다. 이때 니나는 부모님이 앞줄에 앉을 때까지 피아노 연주를 거부했다. 이 사건은 훗날 흑인민권 운동에 참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예술가의 의무는 그가 살아가는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It's an artist's duty to reflect the times in which we live.”


이때 니나의 연주를 본 피아노 선생 뮤리엘 마자노비치(Muriel Mazzanovich)는 단번에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피아노를 가르치기로 한다. 니나의 가족은 너무나 가난했지만, 마자노비치 선생님의 도움으로 음악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줄리아드 학교에서 공부하며 니나는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는 꿈을 꾼다. 17살이 되어 본격적으로 꿈을 이루기 위해 상급 학교인 명문 커티스음악원에서 입학시험을 본다. 뛰어난 성적을 받았음에도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니나는 인종차별 때문에 불합격이라는 결과를 얻었다고 굳게 확신한다.

이후에도 클래식 공부를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부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기에 1950년 대중 재즈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이때 대중음악을 하는 것에 반대했던 가족들 때문에 본명이 아닌 예명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소녀라는 뜻의 스페인어  ‘니나’와, 프랑스 여배우 시몬느 시뇨레의 이름을 딴  ‘시몬’을 합쳐 ‘니나 시몬’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후 작은 무대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고, 입소문을 통해 점차 인기를 얻게 되었다. 1958년 녹음한 ‘아이러브유포기(I Love You, Porgy)’가 빌보드 핫 100 20위 권에 진출하게 되고, 이 곡을 통해 니나는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여세를 몰아 데뷔앨범 ‘리틀 걸 블루(Little Girl Blue)’를 발매한다. 하지만 당시 니나가 연주한 곡들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1964년이 되어서 원하는 음악을 자유롭게 하고 세계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미국 콜픽스 레이블에서 네덜란드의 필립스 레이블로 소속사를 옮긴다. 그해 필립스에서 발매한 첫 번째 앨범 ‘니나 시몬 인 콘서트(Nina Simone in Concert)’에서 인종차별을 다룬 ‘미시시피갓댐(Mississippi Goddam)’을 발표한다. 이 곡은 1963년 앨라배마에서 네 명의 흑인 소녀들을 죽이고 한 명의 부상을 입힌 교회 테러 사건을 다루었다. 이 노래를 통해 니나는 흑인민권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며, 1965년 3월 셀마 대행진에도 함께 한다.

이후 1968년 4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했다. 암살 3일 후, 웨스트버리 뮤직 페어에 모습을 드러낸 니나는 이날 공연 전체를 킹 목사에게 헌정하며 그를 추모한다. 이 공연을 녹음한 것이 ‘너프새드(Nuff Said) 앨범의 토대가 된다. 이 앨범 대표곡이 ‘앤 갓 노, 아 갓 라이크(Ain't Got No, I Got Life)’인데, 흑인 사이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끼쳤다. 한 음악학자는 이 노래를 새로운 흑인 애국가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흑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팽배한 미국 사회에서 니나의 직설적인 가사는 저항의 구호가 되고, 흑인민권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올곧은 정치 성향을 문제 삼은 음악 업계는 니나를 보이콧을 했다. 결국, 미국을 떠나 프랑스, 영국, 라이베리아, 스위스 등을 떠돌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힘든 순간에도 자신의 음악으로 세계 각지에 인종차별의 실태와 심각성을 알렸다. 

                

<Ain't Got No, I Got Life 가사 일부>

그러면 내가 가진게 뭐 있나(Then what have I got)

내가 왜 사나?(Why am I alive anyway?)

아싸, 까짓거(Yeah, hell)

내가 가진 것(I got my)

나 스스로가 있지(I got myself)

팔 있어, 손 있어(I got my arms, got my hands)

손가락 있어, 다리 있어(Got my fingers, got my legs)

발 있어, 발가락 있어(Got my feet, got my toes)

간 있어(Got my live)

피 있어(Got my blood)

목숨 있어(I've got life)

삶도 있지(I've got lives)


<Ain't Got No, I Got Life 라이브 공연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TDY0dueFLFg


니나 시몬은 장르를 뛰어넘어 다양한 곡을 연주했고,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노래로 미국 공민권운동에 아주 큰 영향력을 끼쳤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소속사와의 계약 종료, 남편과의 이혼 후 1993년 유방암에 얻어 투병 생활을 한다. 이후 당뇨병으로 인한 조울증을 앓았고, 2003년 4월 21일 잠을 자던 중 숨을 거둔다. 유언에 따라 화장 후 아프리카에 뿌려졌다. 죽기 직전에 흑인이라는 이유로 불합격 처분을 내린 커티스음악원에서 니나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한다.

흑인이자 예술가로 인종차별에 저항하고 투쟁한 실력파 뮤지션 니나 시몬, 자신의 고통을 승화하며 세상에 전한 저항과 평등에 대한 메시지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대중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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